17화 S.E.S. 숙소 앞 '바다' 누나의 추억 (FT.김동완)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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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S.E.S. 숙소 앞 '유진' 누나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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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S.E.S. 숙소 앞 '슈' 누나의 추억>
17화.
2001년의 어느 여름날, 정확히 일요일 오전이었다. 날씨 한 번 기가 막혔던 그날, 우리는 일요일 오전부터 누나들의 숙소인 청ㄷ빌라 앞에서 일찍이 모였다. 아마도 스케줄이 없었으니까 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찾지 않았나 싶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청ㄷ빌라를 마주 보고 있는 단독 주택의 담벼락 앞에 앉아 있었고 누나들을 기다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을까...? 이제는 누나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그저 같은 팬이었던 친구들, 우리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아무런 걱정이 없던 우리의 열일곱은 초록색으로 가득한 버드나무를 닮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의 그 시원함과 촤악거리는 소리, 그늘진 그 공간은 우리의 열일곱 같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요정 베이커리>를 벼루던 혜진 누나가 이제는 우리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계절이었고 카페 회원수는 어느새 7천 명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서 정오 사이쯤 되었을까?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바다 누나가 나왔는데 아직도 그날의 바다 누나를 잊지 못한다. 나풀거리는 연한 핑크색? 연한 베이지색?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나풀거리면서도 살랑거리는 세미 정장을 입은 바다 누나가 긴 웨이브 머리를 흩날리며 숙소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때 아마도 우리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을 포함한 팬들이 10명 정도는 있던 것 같은데 너무 갑자기 나와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예고 없이 나오는 게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담벼락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런데...?
"얘들아 안녕? 나 성당 갔다 올게!"
라고 바다 누나가 먼저 우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아주 밝은 표정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게 아니었나? 바다 누나는 그럴 리가 없었다(?) 숙소 앞에서는 거의 본 채 만 채 했던 것도 바다 누나였으니까. 그런데 바다 누나가 먼저 그렇게 환한 미소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는 건? S.E.S. 팬질 역사상, 덕질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나 보다. 기분파였으니까 가능했던 것. 그렇게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맑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들을 향해 인사를 해준 그날의 모습은 마치 CF의 한 장면 같았다. 바다 누나가 긴 웨이브 머리를 한쪽으로 흩날리며 우리에게 미소를 보낸 건 샴푸 광고를 연상케 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황당한데 바다 누나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이니까 당시 숙소 앞에 있던 우리도 전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다 누나는 당당한 워킹을 선보이며 아래쪽 골목으로 내려갔다.
"야, 뭐야? 왜 저래?"
"몰라, 오늘 기분 좋은가 봐"
"그러니까"
"적응 안 되게 왜 저런대?"
나처럼, 우리처럼 팬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의 아이돌, 내 연예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때에 이런 경험을 접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니, 팬인데 좋아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갑자기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적응이 안 된다는 게 어쩌면 덕질에 있어 국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도 웃겨 죽겠네. 아이고.)
로데오거리 쪽, 하자(포차 HAJA) 쪽으로 걸어 내려간 바다 누나였다. 여기서 진짜 진상 팬이거나 사생 팬이었다면 바다 누나의 성당까지 그대로 쫓아갔을 것이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 누나는 혼자서 걸어갔냐고? 그렇다. 압구정동, 청담동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연예인이 일반인처럼 걸어 다니는 것. 그렇게 두 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날 결국 유진 누나는 숙소에서 볼 수 없었고 우리 <요정 베이커리>는 학동 사거리(방주병원 사거리)를 건너 로데오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도 성당에 갔다 온다는 바다 누나를 다시 기다리기까지가 힘들고 심심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때의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거의 연예인들의 장소이기도 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웬만한 연예인들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로데오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으니까. S.E.S. 를 따라다니면서도 그 당시 아이돌, 가수들을 많이 봐왔지만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걸어 다니며 마주친 건 뭐랄까...? 카메라 밖에서의 인간적인 연예인들의 모습을 많이 본 것 같다. 그다음 해인 2002년에 데뷔를 준비 중이던 SM 신인 그룹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블랙비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새천년인 그때에도 SM 가수를 덕질하는 우리 같은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런 정보들이 공유되고 있었다. 트레이닝 기간만 5년이었나? 그래서 데뷔도 하기 전부터 굉장히 유명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정말 미친 신인이었고 괴물 같은 그룹일 것이라는 썰이 돌았으니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블랙비트'의 멤버였던 심재원을 로데오거리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이게 '블랙비트' 데뷔 전이었는지, 아니면 데뷔 이후에 본 건지는 모르겠고 정지훈 역시 갤러리아 백화점 앞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역시나 데뷔 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TMI를 풀어보자면 심재원은 정말 아이돌 마스크(?)였고 정지훈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 건 얼굴 크기에 충격을 받았었다. 너무 커서가 아니라 너무 작아서. 웬만한 여자 아이돌 얼굴만큼이나 작았고 이목구비는 또 굉장히 뚜렷해서.
'역시 SM'
이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기억이 있다. 당시 쿨의 유리 누나도 로데오거리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가장 인간적인 연예인의 모습이었다고 할까? 핫팬츠에 조리, 노란색 민소매를 입은 채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로데오거리 중간쯤에 있는 '바다로 가는 기사'(식당 이름)에서도 종종 식사를 하곤 했다. 코 묻은 돈 야금야금 모아서 말이다. 뭘 먹었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고 하나 기억나는 건 식당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는데 우리 앞에 서 있던 사람이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환희였던 적이 있다. 뒤에서 봐도 '환희'라고 쓰여있을 정도로 누가 봐도 '나 환희예요'였다. 뭐 그때는 SM이었으니까 관리가 잘 돼서 그랬는지 굉장히 잘 생겼던 기억이 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도 하도 많이 봐서 우리 바로 앞에 서 있었어도 그 흔한 싸인을 받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었어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싸인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뭔가 암묵적인 곳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그런 것? 압구정에서 연예인을 보면 절대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아야 하는 건 물론, 싸인을 요청하지 말 것. 뭐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는 곳이 바로 압구정, 그리고 로데오거리였다.
언젠가 한 번은 신화의 동완이 형을 로데오거리 한복판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무슨 화보를 보는 줄 알았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서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수많은 인파 속에서 로데오거리를 혼자 걷는데 그 모습을 내가 약 20,30미터 앞에서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아마도 주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동완이 형의 얼굴에만 조명이 켜진 것처럼 반짝거렸다. 혼자서 어딜 가고 있었던 걸까? 상상을 해보아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잘 나가는 신화가 아니었나? 신화의 한 멤버가 매니저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길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상상을.
'바다로 가는 기사'를 마주 보고 있던 '뱃고동'이라는 식당도 꽤 유명했다. (바다로 가는 기사는 지금 없어졌지만 뱃고동은 아직도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두 식당 뭐 비슷한 음식을 팔았던 것 같은데 우리는 여기보다 '정성본' 칼국수를 더 찾았다. 마지막에 볶아주고 졸여주는 그 죽의 맛이 신세계였기 때문. 종종 늦게까지 놀 때면 로데오거리 후문(?) 쪽, 더 정확히는 디자이너 클럽 쪽에 있던 빨간 모자 떡볶이 아저씨의 트럭에서도 끼니를 때우곤 했다. 압구정에서 꽤나 유명한 떡볶이었는데 항상 밤늦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었다. 왜 빨간 모자 떡볶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아저씨의 모자가 빨간색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트럭 앞에는 늘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맛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고 특히 혜진 누나가 광적으로 좋아하던 떡볶이었다.
"여기 지원 언니가 엄청 좋아한대"
여기서 말하는 지원은 배우 하지원으로서, 그 당시 하지원이 좋아하는 떡볶이로도 유명했다(?) 그 시간에 떡볶이를 파는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뭐 어쨌든 글을 쓰다 보니 빨간 모자 떡볶이 아저씨의 추억도 선명해진다. 지금 와서 하나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 내가 덕질을 한 건 절대로 후회가 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전국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왜 누나들의 직찍(직접 찍은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냥 막 찍을 걸. 그때는 왜 그랬는지 누나들의 사진을 절대로 못 찍게 했다. 필름 카메라(디카가 보급되기 전, 막 보급되던 시기)만 들어도 임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으니까. 그게 가장 아쉽고 후회된다.
우리끼리 찍은 사진은 있는데 누나들의 직찍사만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쉽다. 구글에서 찾은 S.E.S. 활동 당시의 누나들 직찍을 보니 그때의 감성과 그때의 색감이라고 할까? 그 직찍사(직접 찍은 사진) 속의 계절과 날씨를 보면 정말 세기말, 새천년의 날씨가 맞다. 2000년의 날씨, 2001년의 날씨, 2002년의 날씨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의 그 계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 속 날씨와 햇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