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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Mar 15. 2021

#9. 신화창조와의 유대감

9화. 신화창조와의 유대감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이전 이야기들을 먼저 보시면 새천년 감성을 더욱 즐길 수 있읍니다.


https://brunch.co.kr/@forsea5999/8

8화 <공식 팬클럽 사서함>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1997년 11월 28일>






9화.


신화 공식 팬클럽 '신화창조'

언제였더라? 아직은 봄이 채 오지 않았던 2001년 2월? 3월? 아침마다 KBS2에서 하던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9번에서 하던 <아침마당>과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는데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기억이 났다. <행복채널>이었다. 어쨌든 그 프로그램에 누나들이 나간다는 스케줄이 있었다. (지금 잠시 기억이 왜곡되었는데 정확하게 그때는 4집 '감싸 안으며' 활동 때였다.) 그때가 아마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여의도역 3번 출구에서 만나 녹화가 있는 KBS 신관(뮤직뱅크 하는 공개홀)으로 발걸음을 얼마나 재촉했는지 모른다. 녹화 시간이 대충 점심쯤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그때는 지금처럼 다르게 경비 아저씨들이 여기저기 계셔서 그 어디로도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은 아예 많은 팬들이 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고 거기서 아예 가수들이 출근길이라고 해서 팬들의 앞에 서주는 하나의 팬서비스가 생겼지만 우리 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결론적으로 출근길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럽다.) 그때 대충 열명 정도의 팬들이 왔었던 것 같다. 그중 반은 <요정 베이커리>였고 그중 반은 포넷이라는 팬사이트에서 활동 중이던 형들이 왔었다. <행복채널>과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의 방청객은 다들 알다시피 아주머니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정도의 아주머니들은 거의 고정적이면서도 전문적인 방청객들이었다. 그래서 S.E.S.처럼 다른 가수나 아이돌이 그런 프로그램에 나온다고한들, <뮤직뱅크>나 <음악캠프>와 달리 팬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와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누나들을 보지 못해도 왜 여의도까지 달려갔을까? 덕질 좀 해봤다면 단번에 알 것이다. 덕질의 기본 중 하나,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하지 말자. 그저 주차장 바깥에 하루 종일 서있으면서 누나들이 벤을 타고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만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날 굉장히 추웠던 걸로 안다. 일찍이 도착해 그 넓은 주차장 바깥을 돌면서 누나들의 하얀색 벤을 찾기 시작했다. 특명 6946 번호판의 벤을 찾아라! 얼마나 지났을까...? 6946 하얀색 벤을 찾았고 우리는 그 벤에서 가장 가까운 바깥에 서있었다. 거의 뭐 2시간은 기다렸던 것 같다.


출처 : 네이버 (당시 훼미리 마트 편의점)

행여나 누나들이 나올까 봐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고 반으로 나눠서 보초를 섰다. 너무 추웠었기에 근처에 있던 '훼미리 마트'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던 것. 그렇게 반씩 나눠서 보초를 선 기억이 난다. 교복을 입고 한 손에는 누나들의 얼굴이 새겨진 개인 현수막을 들고 있거나 플래카드를 들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래도 참 행복하고 재밌었다. 누나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같은 팬인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수다를 떨게 되면 그것 또한 시간 가는 줄 몰라했으니까. 그야말로 우리는 운명 공동체였다. S.E.S.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 <친구>라는 공식 팬클럽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또 우리 <요정 베이커리>같은 각각의 '파'들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시간쯤 기다렸을까? 저기 멀리서 누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녹화를 마치고 나온 누나들이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막 내려오고 있었던 것. 열명 정도 되는 팬들은 그런 누나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주차장 바깥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현수막과 플랜카드를 흔들며. 그런데 누나들의 눈에도 우리가 일직선으로 보였기 때문에 바로 반응을 해줬던 기억이 선명하게 난다. 그날 가장 팬서비스가 최고였던 사람이 바로 바다 누나였다. 내가 지금까지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를 쓰면서 바다 누나는 기분파에, 유진 누나와 수영(슈 본명) 누나에 비해서는 팬서비스가 가장 낮은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날은 누나가 유독 기분이 좋았나 보다.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나는 정확히 그때 그날의 바다 누나가 보여준 밝은 표정을 잊지 못한다. 아마도 S.E.S. 활동 중 그날이 바다 누나가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만큼 엄청난 팬서비스를 보여준 날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누나들이 우리의 앞까지 걸어와 싸인을 해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바다 누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두 팔을 하늘 높이 올려


"얘들아 안녕!"


이라고 쩌렁쩌렁하게, 거리가 있었음에도 누나의 건치가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어준 날이었다. 그때 내손에는 '바다 베이커리'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폭풍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S.E.S. 를 미칠 정도로 따라다니면서 내가 울었던 날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 울었을까...? 너무 추웠던 날이었고 두 시간이 넘도록 바깥에 서 있었던 그 힘듦이 순식간에 녹아 내려서 그런 감정이 생겼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해줬을 때. 그 카타르시스는 아마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서러움이 폭발해서 울었던 건 아닌 것 같고 누나가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두 팔을 올려 손을 흔들어줬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펑펑 울었다.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왔었고 내 옆에 있던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 역시 갑자기 내가 울어대니 왜 그러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다시 2001년 7월로 돌아와 누나들의 라디오 공개방송 스케줄이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있던 날이었다. 여름 활동이 처음이어서 우리 <요정 베이커리> 역시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돌아다녔고 더 미칠 듯이 누나들을 따라다녔다. 정말 뜨거운 여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더워서 죽을 것 같던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라디오 공개방송이었는지는 모르겠고 장소는 여의도 한강 공원, 지하철로는 5호선 여의나루 역에서 가까웠다. 공연 시간은 저녁, 역시나 우리는 일찍이 모여 한강 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누나들의 활동기 중에서도 현장 팬들이 가장 많이 생겨난 시기였고 우리 <요정 베이커리>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였다. 그때 카페 회원수만 이미 5천 명을 넘었었으니까. 그날 <요정 베이커리>에서만 온 회원들도 거의 30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날 신화도 같은 스케줄이었는데 내가 신화창조의 위력에 처음 반한 날이기도 했다. 여러 가수들이 출연하는 스케줄이었으나 신화창조만 천 명은 넘게 왔던 걸로 기억한다. 마침 그날, 이민우의 생파(생일파티)까지 진행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창이 왔을 것이다. 공연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각각의 팬들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출처 : 유튜브 셩공시대 (이때가 맞는 것 같다)

누나들의 '꿈을 모아서' 무대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두 곡은 부르지 않았나 싶은데 그게 맞다면 첫곡으로는 'Unh Happy Day'를 불렀을 것이다. 그다음 4.5집의 타이틀곡인 '꿈을 모아서'를 불렀을 테고. 한참 겨울 활동을 할 때는 H.O.T. 의 공식 팬클럽인 'Club H.O.T.'에게 케어(?)를 많이 받았지만 사상 첫여름 활동 때는 신화와 활동이 겹쳐 이때는 '신화창조'에게 많은 케어를 받았었다. 특히나 신화와 S.E.S. 는 <서세원 쇼>였나? 그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동반 출연을 많이 했었고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도 여기저기서 유명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S.E.S. 팬클럽과 신화의 팬클럽끼리도 상당한 유대감을 갖기 시작했고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누나들이 나올 때는 <신화창조>가 엄청난 응원을 해줄 정도였으니까. 7월 어느 여름의 저녁, 그날의 날씨는 꽤나 선선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강의 시원한 바람이 섞여 더할 나위 없는 덕질이었다. 나는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가 머릿속에 선명하다. 야외무대 위로 잔잔하게 깔리던 드라이아이스와 조명이 서로 겹쳐 예쁜 색깔을 빛내던 날.


얼마 뒤, 신화의 무대가 이어졌고 우리 팬들 역시 펄보라 색 풍선을 격렬히 흔들기 시작했다. 신화의 응원법 중 하나는 '신화산'이었다. (물론 지금도 신화산이다.) 우리 같은 경우는 음악에 맞춰


"S.E.S.! S.E.S.!"


를 외치지만 신화 같은 경우에는 팀명이 두 글자라서


"신화산! 신화산!"


으로 불렸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신화산은 아니었고 내 기억엔 2집까지는 신화산이 아니라 '신화 짱'이었다. 그 당시 두 글자의 팀명을 가진 아이돌의 팬클럽들은 대부분 팀명 뒤에 '짱'을 붙여 응원하곤 했다. 그중 한 팀이 '젝스키스'였고 '핑클'이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보아'가 있었고. '신화산'의 '산'은 높은 뜻을 가리키는 걸로 안다. 그것 말고도 '산'을 붙이면 '화산'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화산'은 또 폭발을 가리키니까 즉 '신화산'은 최고의 인기를 폭발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던 건 아닐까? 원조 짐승돌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열정적인 무대가 이어졌고 나는 주황색으로 물든 <신화창조>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혜성이 형(신혜성)이 <신화창조>의 4기 팬미팅에서 팬들을 향해


"우와, 꼭 귤 상자 같아!"


라고 했던 것처럼 내 눈에도 상큼상큼 한 귤 상자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신화의 팬덤 색깔은 오렌지색, 즉 주황색이었고 다른 가수들의 팬클럽과 달리, 그리고 SM 내에서도 최초로 <신화창조>는 풍선 대신 오렌지색의 응원봉을 들고 다녔다. 그때 우리는 그 응원봉이 참 부럽기만 했다. 풍선은 스케줄 때마다 임원들에게 받아야 하고 그 스케줄이 끝나면 발로 밟아 터뜨린 다음에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신화의 <신화창조>는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응원봉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화의 무대가 끝나자마자 민우 형(이민우)의 생파(생일 파티)가 곧장 이어졌다. 어차피 야외에서 진행되는 무대였기 때문에 현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산책을 하면서 구경하기도 했다. 재밌었다. 신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점점 더 좋아지던 시기여서 내 눈엔 더 즐거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든 스케줄이 끝나니까 밤 9시? 10시? 그쯤 되었던 것 같다.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지하철에 올라탔고 그 당시 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웠으므로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공방을 다니면 상관이 없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누나들만 따라다녔으니까. 당시 나는 쌍문동에 살고 있었는데 같은 <요정 베이커리> 정예 멤버 중에서 나와 같은 동네에 살던 한 살 어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닉네임은 '팬더 유진'이었고 스케줄이 끝나면 항상 나와 '팬더 유진'은 집까지 같이 가곤 했다. 나처럼 '팬더 유진' 역시 통금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매번 동대문 운동장 역(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역)에서 4호선을 갈아탈 때마다 엄청나게 뛰곤 했다. 둘 다 통금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다. '팬더 유진'은 아직 휴대폰이 없었기에 항상 그 친구의 쌍둥이 언니에게 내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곤 했다.


"오빠, 저 '팬더 유진' 언니인데요, 혹시 지금 어디쯤 오셨어요?"


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옆에 있던 '팬더 유진'에게 전화를 건네주기도, 그 친구의 언니에게 곧 쌍문역에 도착한다고 얘기를 하고는 했다. 쌍문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집까지 뛰기 시작했다. 나는 2번 출구로, '팬더 유진'은 3번 출구로. 그때 나의 방패막(?)은 친할머니였다. 할머니가 계시면 그나마 덜 혼났으니까. 가끔 운이 좋을 때는 밤 10시, 11시가 넘어서 도착을 해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게 항상 어서 빨리 씻고 누우라며 말씀하시고는 했다. 내가 늦게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계실 경우, 만약 아버지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귀싸대기 세 대 정도는 맞아야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무서웠는데도 나는 왜 덕질을 24시간 동안 하고 다녔던 걸까...? 재밌으니까. 나는 어디 가서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고 미성년자가 뚫리는 술집은 더더욱 가지를 않았으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터 구석에 앉아 담배를 몰래 피우는 꼬락서니를 보이진 않았으니까. 정말 순수한 학창 시절이었다. 내성적이던 내 성격을 완전히 180도로 바꿔 준 것도 덕질이었으니 말이다.


이럴 수가, 빠샤,샤샤,유치원 모두 우리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이었다...

4.5집 스케줄은 4집 '감싸 안으며' 때 보다 훨씬 더 많이 따라다녔다. 4집 때도 거의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긴 했는데 4.5집은 여기서 더 미쳤던 것 같다. 수도권에 있는 스케줄은 전부 섭렵했다. 언젠가 안산(산본이었는지 안산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둘 중 하나다.) 역 바로 앞에 있는 광장에서 공개방송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그 스케줄은 단 세 명만의 팬들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 세 명이 전부 우리 <요정 베이커리>였던 공연이었다. 수도권 스케줄이었지만 워낙 멀기도 했었고 안 그래도 S.E.S. 는 현장을 뛰는 팬들이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우리 세 명뿐이었던 걸로 안다. 장소에 도착해서도 황당하긴 했다. 많은 팬들 중에서 펄보라 색 풍선을 든 팬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때 아마도 장소가 멀었고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던 스케줄이어서 <요정 베이커리>에서도 많이들 오지 못한 공연이었다. 시샵이던 나와 정예 멤버이던 '적향루진' 누나, 그리고 '유진 낭자', 이렇게 셋이 전부였다. 그 공연엔 임원들도 오지 않았었다. 우리 셋이 전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데 우리 셋은 보라색의 단체복(우비)을 입고 가방에 몇 개씩 들고 다니던 풍선을 불어 자리를 잡았다. 몇 개씩 가지고 다니던 풍선이 신의 한 수였다. 누나들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나와 '적향루진' 누나, 그리고 '유진 낭자' 이렇게 세 명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누나들의 무대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응원했다. 오후 공연이어서 누나들의 눈에도 우리 셋은 확실히 띄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마저도 이 공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때 누나들의 공연은 말 그대로 팬클럽 한 명 없는 슬픈 공연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 셋만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그날. 창피하지는 않았냐고 물으신다면?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창피한다고 생각해서 소심하게 풍선만 흔들었더라면 그건 덕질이 아니었으니까. 덕질은 누구의 시선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셋과 누나들 뿐인 공연장이라고 생각해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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