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함께 걸을 수 있을까
#9 너무 멀었다, 우산 사이보다도 더
by
니테오
Jun 12. 2019
당신과 나는 거의 한 달 만에야 네 번째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당신과의 약속을 앞둔 채 주말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고요한 주말이었다.
주말이 지나자마자 당신에게서 연락이 왔다. 의외였다. 처음이었다.
설렜다. 나는 그 사소한 메세지에 그렇게 설렜다.
당연했다. 당신은, 어떤 의미로든, 내게 이미 특별했다.
그러나 내 설렘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약속을 변경하겠다는 내용의 메세지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네 번째로 만났다.
한 달 만이었다.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그때 나는 한편으로는 한 달 만에 당신을 만날 생각에 설렜다.
또 한편으로는, 한 달 만에야 나를 만나는 당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으로 꽃처럼 단장했다.
나는 바랬다. 당신이 그런 나를 보고 한편으로는, 나처럼 설렜으면 했다.
또 한편으로는, 한 달이 너무 길었다고, 그렇게 후회했으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자주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으면 했다.
Gustave Caillebotte, Rue de Paris, temps de pluie, 1877, Art Institute of Chicago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필이면 그 날, 비가 많이 내렸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고민했다,
큰 우산을 써야할지, 작은 우산을 써야할지.
나는 또 고민했다, 비가 오다 그치다 하면 우산을 가져가지 말아야 할지.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의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큰 우산을 썼다.
당신은 그런 내게 비를 맞고 싶지 않아서 큰 우산을 썼냐며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비가 내리던 그 밤, 나는 당신과 우산을 함께 쓰고 싶었다. 카이유보트의 그림 속 연인들처럼.
그때 나에게 우산의 크기는 상관이 없었다. 나는 당신과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나란히 걷고 싶었다. 내가 비에 다 젖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비를 맞고 심한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아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당신이 우산이 없었으면 했다.
당신이 내게 우산을 깜빡했다고, 그렇게 말했으면 했다.
그래서 내 우산을 함께 쓰자고 해주었으면 했다.
혹시 당신이 내게 우산을 함께 쓰자고할까봐,
당신과 내가 한 우산을 쓰고 함께 걷게될까봐,
그리고 그렇게 걷다가 당신이 비를 맞게될까봐,
그래서 나는 그토록 큰 우산을 썼다.
그런데 내가 기다린 당신은, 나만큼이나 큰 우산을 썼다.
당신과 나는, 그토록 큰 우산을 각자 썼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그 우산만큼의 큰 틈이 있었다.
당신과 나는, 그 틈을 둔 채, 나란히 걸었다.
그때 나는 후회했다,
차라리 작은 우산을 쓸 걸 하고.
내가 작은 우산을 썼다면, 어쩌면 당신의 그 큰 우산을 함께 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내가 당신과 우산을 함께 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당신과 나 사이의 틈은, 조금은 줄어들 텐데 하고.
Brassaï, Rue de Rivoli, 1937
문득 궁금했었다.
당신도 나처럼 어떤 우산을 쓸지 고민했을까.
당신도 나와 함께 쓰고 싶어서 큰 우산을 가져온 걸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우산 아래로 보인, 한 달 만에 본, 당신의 얼굴은 너무 어두웠다.
우산 때문에, 밤이 되어서, 그래서 그늘이 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은 내게로 고스란히 전염되었다.
나는 우산을 접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우산을 접으면, 당신과 나의 거리가 줄어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나는, 차라리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을 때가 좋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산을 썼을 때는,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그 먼 거리를, 큰 우산의 탓으로 할 수 있었다.
한 달 만에 만나서 먼 거리라고 하기에는, 당신과 나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갈라진 틈이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갈라진 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틈에 있는 것은 지난 한 달이 아니었다.
그 틈에는 당신의 과거가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혼자 비오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큰 우산을 쓰고.
Brassaï, Passerby in the Rain, 1935
keyword
그림에세이
사진에세이
관계
3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니테오
아픔을 담은 미술. 네가 모르는 나의 아픔, 내가 모르는 네 아픔. 우리는 언젠가 이 아픔을 알게 될까요.
팔로워
113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8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조차도
#10 오해였다, 당신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