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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19. 2019

#16 인연은 "어느 날 불현듯"

너무 애쓰고 너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연이 아니다.



당신과 다섯 번째로 만난 뒤, 나는 공허함과 허무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만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신과 나는 한 달 후에야 여섯 번째로 만났다.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유는 당신 때문이었다. 늘 그러했듯이 당신에게는 또다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 한 달은 내게 당신과 그만 만나야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내가 당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90%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는, 10% 정도의, 혹시나 하는 헛된 기대가 있었다. 점이라도 보러 가볼까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친구들에게 잘 본다는 곳들의 연락처까지 수소문했다. 그러나 점을 보러 가지는 않았다. 점을 보러 가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내 결정이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미 '당신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지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말 그대로 운명처럼, 어떤 책을 만났다. 이 책은 내 결정에 확신을 주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의 메시지는, 내 결정에 매우 딱 맞는 명분이 되어 주었다.          


Carl Vilhelm Holsøe, Lady(Girl) Reading in an Interior, 1900, Private Collection




<<일주일>>, 어느 날 불현듯, 만난 책     


당신과 만나기로 했던 그즈음에 우연히 책 한 권을 접했다. 바로 김려령의 <<일주일>>이었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혼한 두 남녀가 멀고 긴 시간을 돌아 우연히 필연의 장소에서 만난다. 짧은 만남 후 헤어진 그들은 필연의 장소에서 다시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더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운명적인 일주일의 사랑이 사실은 진짜 운명이었다.”


문제는 이 책이 내게 준 메시지에 있었다. 물론 사람마다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메시지는 다를 것이다. 사람이란 결국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의 메시지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의 엄마가 찾아간 무당을 통해서 내게로 왔다.


첫째, 인연은, 필연의 장소에서 만나게 한다. 그 인연을 알아보느냐, 못 알아보느냐는 본인의 몫이다.

둘째, 인연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두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인연은,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게 특별하게 남았다. 책을 읽고 쓴 감정적인 글에 이 책이 내 삶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신은, 너무 애쓰고 노력하고 있던 내게, 그런 관계는 인연이 아님을 말해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너무 애쓰고 너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인연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노력하는 것은 인연이 아님을, 그래서 당신은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노력해보고 싶었다. 나는, 시간을 돌이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에서 당신이, 가보지 않은 길처럼, 아름다운 미련으로 남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그렇게 노력했는 데도 잘 안 되었으니 인연이 아니라고 말할 있는 게, 차라리 좋았다.  그리고 또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이미 내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당신은 인연이 아니라고 결정된 상태였다. 그래서 내게는, 나 스스로, 당신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명확하고 합당한 명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지난 몇 개월간 당신을 만나며 나는 너무 노력해서 지친 상태였다. 그때 나는, 노력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기도 했다. 이번에도 인연이 아닐 수 있음을 직감했음에도 부정하고 싶었다. 굳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찮았다. 적당한 당신을 만나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내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당신에게 적당히 맞추며 지난 몇 개월을 보냈다. 당연히 괜찮았을 리가 없다.     


자유롭게 산 지 40년이 가까운 내가, 매우 성실한 연인만을 만났던 내가, 평균치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당신에게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노력하고 애쓰며, 당신에게 맞추었다. 그 이유는 곧 마흔인 미혼녀가 주말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물론 맞선이든 소개팅이든 선개팅이든, 그와 비슷한 것들을 할 기회가 있음에는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그리고 내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게,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는가.

황금 같은 주말에 낯선 사람과 낯선 장소(낯선 장소라고 하기엔 맞선 보는 장소가 특정한 몇 군데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다)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늘 부담이 컸다. 거기다 소개해주신 분에 대한 예의로 적당하게 꾸며야 했다. 이것도 내게는 상당히 스트레스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적당한 횟수로, 맞선을 보며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청첩장이 자주 배달되는 계절에는 더욱 그렇다.

아마 나와 맞선, 소개팅, 선개팅의 상대였던 분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그 사람들 역시, 한편으로는,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압박에 못 이겨, 부모님께 적당히 효도하려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왔을 것이다.


당신과의 만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신도 나도 그런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과 내가 계속 만나면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좋은 점은 두 가지나 있었다.

첫째, 주말마다 맞선을 안 봐도 된다. 물론 헤어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므로 일시적이기는 하다.

둘째, 결혼의 압박이 있기는 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없을 때보다는 덜하다.     


내가 생각한 당신과 만나 좋은 점은, 결혼할 배우자의 좋은 점이나 결혼할 배우자를 만나 좋은 점이 아니었다. 단지 이 관계의 좋은 점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관계에서, 내가 당신이 아닌 누군가를 대입해도 성립할 수 있었던 좋은 점이었다. 또 생각해보니, 당신은 그 어느 것 하나 배우자로서 적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이한 사람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이 관계에 성실하지 조차 않았다. 이런 생각 끝에 내게 한 가지 질문이 스쳤다.    



나는, 당신이 가진 조건이 모두 다 없어진다고 해도, 당신과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니다. 시작부터, 당신과 나는 맞선남, 맞선녀가 되었기에, 적당하지 않은 질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선이라고 해서 이 질문이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조건을 제외한다면, 당신만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적당하지 않은, 매우 특이한, 당신은, 아마도 나와 만났을 때가 당신의 본모습일 것 같다. 그 모습들 중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사람이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그 조건들은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그 조건들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 질문은 당신이 아니라는 답을 더 명확하게 했다.

 

나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위해 애쓰고 싶지 않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 마음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는 나를 속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의 부인, 딸, 친구, 엄마 등등의 모든 역할을 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고 싶었다.




Marcus Stone, In Love Painting, 1888, Nottingham Castle Museum and Art Gallery



나는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는 인연이, 그러니까 결혼할 배우자와의 인연이, 노력하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너무 애쓰고 노력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어야 하는 것은, 인연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감정이 늘 처음과 같을 수는 없다. 인연을 만난 그 처음처럼, 모든 것이 설레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함께 흘러, 더 좋아지든지, 더 나빠지든지,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그 인연을 아름답게 유지해가기 위한, 서로 간의 적당한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노력은 서로가 정말 결혼할 인연일 때, 서로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된 인연을 지켜가기 위해서,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닐까. 아무런 노력 없이, 혹은 그저 한쪽의 노력에만 기대어, 스톤 Marcus Stone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지 않을까.


그러나 인연이 아니라면, 상대가 결혼할 배우자가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혹은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너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답이 아닌 것 같다. 다만 이걸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처음부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말기도 한다. 나이 때문에 조급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노력은, 적어도 나에게는,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길이었다. 내가 무리하게 애쓰고 노력해서 내 곁에 있는 인연이라면, 내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나를 떠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인연을 위해 평생 노력하며 애쓸 수 있을까? 그렇게 애쓰고 노력한다면, 당신을 만났을 때의 나처럼, 지쳐버리고 말 것 같다.

     

당신을 포함한, 지난 만남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관계들을 지속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늘 당신들은 한결같이 적당했다. 어쩌면 나는 매번 적당하지 않은 그들을 적당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내가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그 인연들은 다 거기에서 멈추었다. 돌이켜보면 거기에서 멈춘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당신을 적당하다고 포장했던 그때부터,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 스스로까지 포장했던 그때부터, 나 스스로는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애쓰고 너무 노력해야 하는 관계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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