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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l 03. 2019

#30 당신을 잃고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종이에 싸인 당신의 마음을 펼쳐본 그 순간에야, 비로소.





삶의 순간순간, 당신이 스친다. 당신과 함께 걷던 길, 당신이 살던 집, 당신과 함께 가던 음식점... 무엇보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목소리...


내 귓가에는 아직도, 병실에 들어서던 내 이름을 불러주며 나를 반기던 당신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죽음 앞에서도 내 손을 잡으며 나를 걱정하던, 당신의 그 따뜻한 손길도, 내겐 여전하다.

그런데도 시간은 이렇게나 빨리 흘러, 당신을 보낸 지, 벌써 1년이나 되어간다.


아마 내 남은 삶 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을 더 사랑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내게 당신은, 애틋하고, 아프게, 남을 것이다.



Mary Cassatt, Maternal Caress, 1896,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당신 앞의 나는 늘 나다울 수 있었다. 

당신 앞의 나는, 늘 당신과 함께 했던 그 어린 날의 나였다. 

당신 앞의 나는 늘 아이처럼 감정에 솔직했다. 질투도 미움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속일 수 없었다. 당신이 늘 나를,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할머니여서, 오랜 연륜과 경험 때문에 내 마음을 잘 알았던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기에, 내 마음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당신의 마음을 열어보았을 때,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물건을 정리하며 내 사진을 보았다. 

종이로 곱게 싸 둔 내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신의 마음은 종이 안에 있었다. 당신은, 도대체 왜 그 마음을 숨겨둔 것일까.

당신의 마음을 알았던 그때, 그 순간, 나는 무너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당신을 원망했다. 

도대체 왜... 말하지 않았는지... 이 사진을 내가 보게 될 것을 당신은 알았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해야 했는지... 도대체 왜... 보고 싶으니까 더 자주 오라고 말해주지, 더 많이, 더 자주, 말해주지, 당신은 왜 더 말하지 않았는지...


내 사진을 종이로 곱게 싸서 접어둔 당신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당신은 늘 그랬듯이 보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은 늘 그랬듯이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혹여 내가 그 마음을 알고 당신한테 미안해할까 봐 아마도 당신은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알았던 만큼, 그래도 나 역시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돌이켜보니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면서 이렇게 모르는 척했다.
나를 기다리는 당신의 마음을 알면서, 당신이 그렇게, 종이 안에 마음을 담아두게 했다.


돌이켜보니 당신은 늘 나를 기다렸을 텐데, 나는 잘 몰랐다.

당신은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의 그림 속 어머니보다 더 어두운 방에서, 그렇게 나를 기다렸을 텐데... 나를 기다리던 그 마음을 나는 왜 몰랐던 걸까... 

나는 당신을 기다리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1871, Musee d'Orsay, Paris



나는 내게 사랑만 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당신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주었다. 

내가 가장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도...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당신이 떠난 뒤에야 알았다.

나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면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내가 사랑한 당신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처 받은 입장에서 상처 주는 입장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비난했던 누군가의 모습은 또 다른 나였다.

그 누군가의 모습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던 그런 내 모습이었다.


나는 이렇게,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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