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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Aug 23. 2019

#41 상처로 남은 말, “너에게 집중해”

그때 나는 당신이 아닌, 친구를 잃었다.


“너에게 집중해”

이 말은 내게 한 사건이었다.

이 말은 내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으며 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느 순간에서인가부터 하나의 상처로 남았다.

지금도 이 말은 여전히, 위로와 상처 사이에 놓여 있다.

어쩌면 여전히, 상처에 가깝다.



Edvard Munch, Melancholy, 1892,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내 오랜 친구들은 내가 오랫동안 부모님의 결혼 압박으로 힘들어했던 것을 안다. 내가 남들이 결혼하는 나이 정도 되어서 남들 다 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생각했음도 안다. 그들 중 일부 역시 나와 같은 상황이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둘씩 떠나 이제는 텅 빈 듯한 교실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었달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이 생겼었다.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당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나는 매 순간 그토록 적당한 당신들을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었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그 어떤 당신도 못 가본 아름다운 길로, 미련으로 남지 않았다. 아마 시간을 돌린다 해도 나는 그런 적당한 당신들을 만나 많이 사랑할 것이다. 인간이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겉으로만 태연한 척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렇게 지난 사랑을 쉽게는 잊지 못했다. 나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내 친구들도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중 몇몇은 내게 남자를 만날 기회를 자주 주선하고는 했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라고 생각해”라는 말을 들었다. 

적어도 나에겐 사건이었다.     


우리 중 한 명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축하할 일이었고 축하했다.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그 사랑을 지켜왔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그와 헤어질 듯 헤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늘 그녀의 그분을 반대했음에도 그랬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훨씬 큰 상태였다. 비록 친구인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 마음에서 했던 반대였으나 썩 편한 마음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나는 당시에 만나던 사람과, 정확히는 결혼을 생각하며 만나던 사람과 헤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였으면 했었다. 결혼하기에 너무나 복잡한 그 모든 상황들, 그의 습관적인 거짓말, 심지어는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도, 더없이 적당하게 여긴 나였다.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내 머리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이미 시작된 마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와 만나며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신에게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내 삶에 그토록 절실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싶었다. 남들은 대학입시를 위해 찾는다는 영험한 기도처까지 찾아 어느 산까지 갔었다. 등산이라면 치를 떠는 나다. 내려올 걸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는 그런 나다. 그런 내가 그 높고 험한 길들을 갔었다. 그 산을 오르면서 사랑을 지키는 게,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들겠다 생각하고는 했었다.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던 내가, 막 헤어진 상태였으니, 당연히 괜찮을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4시간이 걸리는 그 퇴근길을 울면서 걸어서 갔었다. 누가 봐도 적어도 사연 하나쯤은 있는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Edvard Munch, Melancholy(The Reinhardt Frieze), 1906-7, Neue Nationalgalerie, Berlin




그런데, 축하를 건네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지금을 너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내게 버거운 그를 감당하려 했었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때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그를 운명으로 믿으려고 했었는지를. 심지어 그때 나는, 그와 운명처럼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 사실조차 잘 알고 있던 그녀였다.


그녀도 멀고 먼 길을 돌아서 그 남편과 다시 만났다. 그를 기다린 그녀의 그 시간이 스스로에게 집중한 시간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힘들었음을 나 역시 지켜봤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그렇게 쉽게 나에게 집중하라고 말했다.     


당시에 그녀가 건넨 “너에게 집중해” 그 말은, 매우 서운했다. 

그녀와 함께한 지난 시간이 한순간에 의미 없게 느껴졌다.

뭉크의 그림 속 여인보다 더, 세상이 허무했다고 해야 하나. 인생이 덧없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행복을 바란 것조차 억울했다.

그녀는 내가 기쁠 때 정말 기뻐한 적이 있었을까.

평소에는 위로처럼 들렸던 그 말이, 내게 힘이 되어준 그 말이, 그때부터 내게는 상처가 되었다. 

간신히 그 자리를 버티고 나와서 집으로 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 나는 누가 봐도 이제 막 헤어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행인 건 밤이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나도 내게 집중해야 하는 이 순간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지금도 잘 알고 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즐기며 보내고 있다. 내가 그 시간의,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멀리 돌고 돌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그녀가 무심코 던진 그 말을, 결혼을 앞둔 신부의 날카로움이나 예민함으로만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 내가 잃었던 것은 그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 아낀 그녀를, 늘 고마운 친구로 생각한 그녀를, 영영 잃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녀는 더 친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가서 직접 축하를 건넸다.

(이쯤 되면 나는 공식 호구인 듯하다.)          




그런데 인연이란 건 내 생각보다 무서웠다.

나는 그때 당신과 헤어진 이후, 그녀도, 당신도 다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그녀와 내가 계속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그녀에게 더는 연락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렇다. 마음에 없는 말들을 주고받을 만큼 나는 성숙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놀랍게도... 나는, 당신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편한 사이가 되었다. 동성 친구 같은 그런 사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남들이 보기엔 상당히 이상하며 지나치게 쿨하며 조금은 위험하겠지만 말이다. 아마, 당신도 나도, 아직은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당시에 내가 간절했음을 드러내지 않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연 때문인지, 덕분인지, 아직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또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그 말, “너에게 집중해”를, 다시 들었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똑같은 상처는 늘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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