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그때도 산티아고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고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도 많았다. 걷다 보면 한국사람 만나는 게 제일 쉬웠으며 들리는 말로는 산티아고 걷는 외국인 1위가 한국사람이라고도 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제일 많이 했던 질문도 왜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산티아고 길을 걷느냐는 것이였다.
원래 걷는 것을 싫어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살았다. 아파트 단지 내 슈퍼까지 100m 남짓한 거리도 차를 타고 갔고 지하철 오르내리는 게 귀찮아서 지하철 5정거장 거리의 회사도 택시 타고 다녔다. 그런 내가 산티아고 700km를 걷겠다고 했을 때 지인 모두 웃었다. 후배 한 명이 그곳을 가는 이유를 물었다. 자아를 찾기 위해서라는 나의 포부를 들은 그는 학교 앞 운동장 한바퀴 돌면 그 자아 찾을 테니 가지 말라고 했다. 당시 나는 운동장 한바퀴는 커녕 반바퀴도 안걸었으니까 그의 충고가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난 갔고 700km를 걸었을 뿐만 아니라 산티아고에서 묵시아까지 100km를 더 걸어, 총 800km를 걸었다.
처음 2주는 힘들었다. 10kg 이상의 배낭을 메고 하루 20km를 걷는데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그렇지 않아도 디스크로 허리도 안좋은데) 발에 잡힌 물집으로 한발 딛기도 힘들었다. 목욕탕 같은 곳에서 다같이 샤워하고 매일 남녀 구분없이 4-50명이 한곳에서 자는데 도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자아찾기는 무슨, 개인 사생활 찾기도 없었다. 그런데 계속 걸었다.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 걷기에 중독됐는지 매일 25km 이상을 걷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렸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이틀을 쉬었더니 자려고 누우면 다리는 움직이려 했다. 그래서 4일을 더 걸었다.
자꾸 걸으려는 증세는 한국 와서도 한동안 계속됐다. 회사 일로 바빠 못 걸을 때면 주말에 몰아서 걸었다. 한강을 따라, 서울길을 따라, 둘레길을 따라. 여유가 될 때는 올레길을 걸었고 숲이 그리우면 산에 올랐다. 걷기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지금도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복잡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심란할 때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걷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걸었다는 성취감은 생기고 그 성취감이 작은 위로가 됐다. 오늘 합정에서 일을 보고 난 후 집까지 걸었다. 핸드폰으로 확인하니 21,542걸음, 13.6km가 나온다. 나쁘지 않은 숫자들이다. 어떤 의미도 없던 오늘 난 걸었다. 그리고 이 숫자들이 오늘 내 하루를 완벽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