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대통령 선거가 오는 5월 28일에 다시 한번 더 실시된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내가 다니는 터키어 학원의 미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인 학생들은 모두 내게 대통령 선거 이후의 불안을 이야기했다. 미리 대량의 물과 쌀을 샀다는 이야기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상황이 올 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했다. 귀가 얇고 걱정이 많은 나는, 그들의 말에 따라 사재기를 시작한다. 튀르키예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안 하던 사재기를 조금 했다는 말에 나도 학원을 마치고 와서,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우리도 뭘 좀 사자."
쌀도 물도 가득, 차에 가득 실었다는 미국인 엄마의 말에 나도 그래야 하는 건 아닌가 불안감에 빠진다. 그래, 걱정만 하지 말고 사 모아보자며 그들처럼 미#로스에 잔뜩 먹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곤 소고기를 더 사자며 한동안 가지 않던 식육점(Kasap:캬샵)에 가서 쇼핑백 가득 고기를 사 온다. 그런데 식육점 주변의 이발소, 과일 가게, 차이(터키식 홍차)를 마시고 있는 어르신까지 모두 평온한 모습이다. 불현듯, 나만 이렇게 불안한 건 아닐까 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튀르키예 하늘은 오늘도 참 파랗다.
지난 첫 번째 대통령 선거 결과, 그동안의 외신 보도와는 달리 에르도안 대통령의 득표율은 생각보다 높았다. 1위는 에르도안 대통령(49.40%)과 2위 클루츠다로을루 대표(44.96%)로 그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튀르키예 대통령 선거는 한 후보가 전체 투표수의 과반수가 넘는 득표를 해야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로인해 오는 5월 28일, 1위와 2위인 두 후보는 다시 한번 승부를 겨룬다. 불가리아에서 이스탄불로 돌아오던 국경에서 나는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는 그들의 선거를 보며, 아직 이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쩌면 나의 불안과 걱정과 달리 그들은 참으로 평화롭게 이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학교에서 근무하던 첫 해, 초임교사로 그 어떤 것도 모르던 그때의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풋풋하던 20대의 교사였던 나의 예상과 모든 것은 달랐다. 몇몇 아이들은 출발부터 학교에 늦게 왔고 우리 때의 수학여행처럼 배낭에 이것저것을 챙겨 오는 것과 달리, 이미 아이들은 자기의 캐리어가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아직 평범한 학생처럼 입고 왔지만, 반에서 흔히 잘 나간다는 그 친구들은 그때 유행하던 어느 아이돌 못지않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왔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어디든 잘 나가는 친구는 있다. 가끔 나보다 화장을 잘해서 당황스러울 만큼, 내 눈에 아이라인을 그려주겠다며 아이는 화장품을 들고 내게 돌진한다. 무섭다는 내게 그녀의 눈썹 깎는 칼은 쓱쓱 소리를 내며 내 눈썹을 최신 유행으로 다듬어주었다. 가끔 내가 언니인지 선생인지 그런, 그때는 내가 아이들에게 늙어 보였으면 하고 바라었으니 나는 그때, 참으로 어렸다. 이게 교사로서 떠나는 나의 첫 번째 수학여행이었다.
내가 초임으로 근무하던 학교는 도심지에 있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한 학년의 학급수만 10학급이 넘는 큰 학교였다. 솔직히 수학여행을 가던 4월까지 우리 반을 제외하고 내가 수준별 수업으로 가르치는 모든 학생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교사로서 연차가 생기고 수업에 있어 아이들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아이들이 첫날에 싫어하더라도 수업 시간에 지정좌석제를 실시했다. 이 녀석들을 정해진 자리에 앉히는 것이 모든 수업의 시작이었다.
가끔, 아이들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제 이름 알아요?"
"응, ###."
그 대답이 맞고 틀림에 따라 아이들을 내 말에 귀 기울이고집중했다.
그 녀석들의 이름을 먼저 외우고, 그 이름에 그 친구가 나를 바라보는 게 언제나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을 기억했다.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면 아이들을 수준별로 가르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론 중등학교에서 상, 중 하의 구성원 중 '하'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누구보다 큰 좌절감을 가지고 그 교실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런 반편성에서 누군가의 성적 향상으로 해당 시험 이후 엄청난 변동이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교사로서 거의 일 년 내내 비슷한 구성원을 맞이한다.
솔직히 '하'의 구성원에게 엄청난 변동을 일으키기 위해선, 남들이 공부하고 있을 때도 나는 공부하고, 남들이 공부하지 않을 때도 내가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늘 마음을 먹지만 나 또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가. 어쩌면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것도 그 아이가 가진 하나의 재주, 재능에 가깝다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 세상에는 나보다 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에는 늘 '하'가 존재한다. 아니 모든 사회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하'에 속하는 친구가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그 친구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과 나의 눈이 어떠냐에 따라 학급의 반 분위기는 참으로 달랐다. 뒤돌아보니 나는 이제야 그 마음을 알아간다.
그렇게 나는 참으로 다양한 친구들을 교사로서 만났다. 그 친구들과 첫 번째 수학여행, 아침에 술을 모두 거두어 들었고 나의 여러 번의 당부에도 지각하는 우리 반 녀석 때문에 학교 전체는 출발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은 출발을 했다. 그러나 휴게소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공공 화장실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피워댔다.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던 그때, 너무 화가 났다. 담배를 피운 녀석들을 잡아 화장실 앞에서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초임교사였던 나는 그렇게 열불을 냈다. 그리고 금세 아이들은 교무부장 선생님의 지시에 모두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들 대신 교감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그때, 교감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 아이들 잘 키우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님 마음대로 되지 않아."
" 우리는 이 수학여행의 시작할 때 인원 그대로,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만 해도 충분해."
몇 번의 수학여행 이후, 그리고 그 아이들과 몇 번의 이별을 한 후에 나는 깨달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니 내가 가르치는 그 아이들이 처음 시작과 같이 학교에 모두 건강하게 잘 다니고 있는 건만으로 다행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금 이것 때문에 우리 녀석이 잘못되진 않을까 하는 무수한 고민으로 그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을, 그 아이들과의 헤어짐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게 다시 찾아오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는 불안하다는 것을. 그 불안 속에서 '괜찮아'라고 말하고, 쉽게 화내지 않고 그들을 안아주며 단호하게 그들에게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5월 28일 누군가는 불안을 이야기하고 그 불안과 미래를 걱정한다. 나 또한 그 불안에 같이 서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함께 떨고 있기보다 담담히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기를 다시 바라본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지도자가 되더라도 자신의 나라의 국민 모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적지에 데리고 함께 가기를, 그 어떤 이유이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강압이나 폭력이 없기를 바란다. 작은 교실, 변화무쌍한 사춘기의 녀석들. 그 친구는 참으로 외로웠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한 아이 덕분에 나는 그 어떤 선생님보다 교실에서 행복했다.
리더의 무게, 누군가가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이 늘 먼저임을 세상의 모든 리더들이 기억하길,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막연한 불안이 없기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