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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반대말은, 알잖아.

학습의 결정은 마음, 아이의 감정이다.

by 미네

어느새 아들의 국제학교의 학기말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7월까지 한창 학교를 다닐 시기인데, 작년 9월에 시작한 아들의 1년은 어느새 6월 말이 되면 끝이 난다. 비가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는 오늘, 아들은 과연 예정되어 있는 소풍을 갔을까? 이스탄불의 테러, 폭설, 지진, 대통령 선거 등으로 미뤄진 여러 가지 행사를 몰아서 치르느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더욱 바쁘다.


지난 9월, 학기가 시작하던 시점에 나는 비장한 각오로 학교에 갔다. 아들의 알레르기 때문에 학교의 학장(한국의 교장선생님), 부학장(교무기획부장 선생님), 보건교사, 담임선생님까지 5자 대면을 했다. 학교에 가서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절대적으로 수의 열세를 가지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온다. 학교의 어려운 사정만 듣고 오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여러 번의 대화 실패로 요구사항을 영어로 정리해서 적어갔다. 막상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공세에 밀려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왔던 지난 세월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리 적어간다. 그리고 회의 참석자 수를 고려해서 표로 정리한 내용을 출력해서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교감선생님께 보고하듯 말한다. 덕분에 영어가 참 많이 늘었다.

여러 엄마들로부터 들어, 익히 꼼꼼하다고 들었던 아들 반의 담임 선생님은 겪어보니 정말 예상대로 꼼꼼했다. 아들을 키우며 엄마로 살면서, 인간 사는 모습이 모두 똑같구나 싶은 것이 한국 엄마나 외국 엄마나 만나면 선생님 이야기를 종종 한다.(참고로, 교사는 모이면 학생 이야기를 한다. 아하하하.) 한국의 공립학교처럼 매년마다 교사가 학년을 바꾸거나 반을 옮기지 않고 한 교사가 한 학교에서 동일한 학년을 오래 가르친 경우가 많아, 족보처럼 그 교사에 대한 엄마들의 평가도 전해진다.


튀르키예어 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사유리가 남편이 일본인 학교 교사라, 주재원이면서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일본인 엄마들이 자신과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며 내게 그녀의 외로움을 말했는데, 나도 우리 아들 선생님의 남편 또는 아내를 학교 밖에서 만난다면, 아마 나도 피할 거라고 그녀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학부모는 교사가 어쩔 수 없이 어렵다. 교사가 학부모가 어려운 것처럼 모두 조심스럽다.


그러나 인생사 살아보면 모든 일에 다 나쁘고 다 좋은 건 없다.

선생님이 꼼꼼하면 아이들 공부도 꼼꼼하게 가르칠 것이고, 어떤 교사의 눈엔 별 일 아닌 일도 아주 꼼꼼하게 혼낸다. 아하하하. 일 년 동안 아들의 담임선생님과 내가 나눈 이메일 수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학교 일에 대해 자주 알렸는지, 이유 불문하고 그녀에게 고맙다.


이메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의 반 친구들이 교실의 카펫 위에서 놀고 있었다. 친구들이 카펫을 벗어난 순간, 아들이 냅따 뛰어서 카펫에 앉고 싶어서 '내 자리!'라고 외친다. 그리곤 애들이 달려와 지훈이에게 항의한다. 아들이 귀를 막고 '에에에'라고 외친다. 알래스카 그녀가 지훈이를 혼낸다. 사과하고 오후 수업을 잘 듣고 행복하게 끝났다고 한다.


대략의 메일 내용은 이렇다. 칭찬 메일도 있고 이런 아이들의 투닥거림도 자세히 적어주신다. 내가 교사로서 살던 시간을 생각하면, 학교 업무가 많고 바쁘면 잊고 연락을 못하기도 하고 실상 수업이 비는 시간이 아니면 메일을 챙겨서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교사로서 삶을 돌아볼 때, 교사가 부모님께 메일을 쓰는 경우는 보통 자신이 생각하기에 평소보다 그 아이에게 혼을 많이 냈다고 생각될 때이다.


어쩌면 선생님도 그냥 사람인지라 부모처럼, 아이에게 혼을 내고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불편한 감정이 들 때, 펜을 들게 되어 있다. 우리도 아이에게 평소와 다르게 혼을 내면, 깊은 밤이 되어 잠들어 있는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교사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메일을 받으면, 가끔 아들에 대한 걱정을 더하게 만들어서 마음의 불안도 일으키지만 그녀의 학교에서의 쉼에 그 소중한 시간을 써서, 내게 아이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써 준 것이 아닌가 하며 고마움을 느낀다. 얼마나 부지런한 교사인지 메일함을 보며, 학기말이 되어 새삼 더 느껴진다.


아들은 그 꼼꼼한 알래스카 여인인 선생님께 지난 일 년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받은 메일의 비율을 보면 그녀에게 혼난 내용이 많은데 이렇게 혼나도 아들이 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그녀다. 사실, 그녀에게 내가 메일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은 편지에는 당연하게 느끼고 나쁜 일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았는데, 결론은 아들은 내 감정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아하하하. 내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아들은 선생님을 참으로 좋아한다.




교사로 교실에 있을 때, 나에겐 정말 악당 같은 녀석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잠자는 것은 기본이고 고함지르기, 다른 친구 건드려서 수업 방해하기, 학습 활동 안 하고 짜증내기, 이건 양반이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도 없다. 그의 교과서가 주인을 잃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누군가가 그 교과서를 훔치고 또 훔치고, 이 뫼비우스의 띠는 중학교 교실에서 흔히 일어난다. 이 아들 녀석들, 아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 녀석 교과서를 들고 다닌 적도 있었다. 늘 다른 친구의 교과서를 훔쳐오니까 말이다.

"훔치지 말자. 이 녀석아."


그런 녀석을 대다수 선생님들도 싫어하셨는데, 알고 보니 중국어 선생님 수업은 유일하게 열심히 듣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책에 필기도 하고, 선생님이 활동을 위해 종이를 자르라고 하면 가위로 자르고 만들기도 하고 중국어 노래도 불렀다고 했다. 아하하하. 그렇다. 배신감이다. 내가 책을 갖다주고 챙겨줘도, 아무리 잘해줘도 쓸모없다. 아하하하. (참고로 중국어 선생님은 참으로 미녀였다.)


그 녀석은 중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중국어 선생님은 나와 달랐다. 내가 못 가진 그런 아름다움과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그 녀석은 다른 과목 시험은 시험지 받자마자 엎드리며, 모두 20, 30점을 받아도 중국어는 제법 높은 점수가 나왔다. 그리곤 그 친구가 교무실에 중국어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일이 잦아졌고 아이도 참으로 밝아졌다. 대단한 성적의 학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기 말 즈음에 교실에서 제대로 앉아 있으려고 하는 모습이 느껴졌으니, 분명 그 녀석에게 그 선생님은 그 어떤 유명 강사보다 좋은 선생님이신 것이다.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학을 공부하면 만나는 유명한 교수 학습 이론이 있다. '캐럴의 완전 학습 모형'이다.

교육학을 공부했다면 모두 알만한 아주 유명한 이론으로, 학습의 정도는 학습에 필요한 시간과 학습에 사용된 시간과 관계있다는 이론이다.

즉, 학습자가 시간만 충분히 할애한다면 누구나 완전학습에 이를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론과 달리, 모든 학생들이나 일반인은 완전학습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이유는 이 이론의 변인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변인을 살펴보자. 변인에는 학습자와 수업(교수자)의 변인이 있다. 이 변인에 따라 아이의 완전학습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학습자의 변인에는 '적성', '수업이해력', '지구력'이 있고 수업변인에는 '교수의 질', '수업 기회'가 있다.


결국, 학생이 완전학습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수의 질이 아주 좋거나 학생에게 수업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학교의 교사의 질이나 담임선생님을 학부모는 결정할 수 없다.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이러한 교사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한국처럼 다양한 학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엄마가 노력해서 아주 좋은 교사를 만나게 하고, 많은 수업 기회를 아이에게 제공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바로 아이의 변인, 학습자 변인이 문제다. '적성', '수업 이해력', '지구력'은 엄마가 아이 옆에서 24시간 함께 하지 않는 이상, 그 교실에서 그 아이만 바라보는 교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실제적으로 이 변인을 모두 통제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고 국어로도 글쓰기가 편하지 않는데 갑자기 영어로 에세이를 쓰라고 하면 아이는 무엇을 적겠는가. 결국 '수업 이해력'과 '적성'은 모국어인 한국어로서 다시 설명해주지 않으면 학습자는 영어로서 이해하는데 한계가 생기며, '지구력' 또한 문제가 생긴다.


'칸 영화제'의 작품상을 받은 좋은 작품이라며 내게 보여준다고 한 들, 내가 그 감독의 페르소나나 상징 등을 모른다면, 그저 지루한 영화 한 편을 본 내 지구력에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이에게 보여준다고 그것이 아이의 것이 될 것인가.

아이는 더 답답하다. 결국 심리, 마음의 문제가 다시 생겨난다.


그럼 누군가는 내게 물을 것이다. '엄마는 욕심을 모두 버리고 누워있어?'라고 물어볼 것이다. 아니다. 아이 옆에 엄마는 '지구력'이 생기도록 같이 앉아야 한다.


'교수의 질', '수업 기회', 그것을 찾으려고 이스탄불에서 그리고 다른 외국에서 주재원의 아내로서 돌지 않기를 바란다. 요즘 대치동의 유명 강사들은 모두 연예인처럼 살고 있다. 인터넷에 그들의 일 년치 강의는 모두 올라가 있다. 입시를 목전에 둔 아이들은 그 강사의 기출문제 분석 스케줄에 따라 전 강의가 마감되기도 하고, 그 강사의 조교가 되기 위해 시험도 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방에 사는 아이는 직접 서울에 올라가서, 그 수업을 듣는다. 대단한 노력이다. 물론 고등학교 이상의 자녀를 둔 학부모는 다양한 입시 정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저학년이며 중학생 이하라면 우리는 아직 결승점 앞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다른 곳에 두어야 한다.

EBS 사이트, 강남구청 인터넷 강의, 각종 대형 학원의 프리패스 등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이용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나의 아이의 '지구력'은 평범해 보이고, 그들을 관리하기에는 어느 순간 너무 힘들다. 내 말을 안 듣는다. 직장에 다니거나 둘째, 셋째 때문에 그 녀석만 볼 수 없다. 아이가 공부하려고 하면, 둘째나 셋째가 와서 첫째 아이의 공부를 방해한다.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야 한다. 아이의 수업 이해력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서는 내가 옆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그리고 가장 표준화되어 있는 EBS 교재부터 봐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주재원의 자녀들은 우선, 교과서부터 제대로 읽어야 한다.


제대로 될 턱 없는 하루도 결국, 아이와 나의 긴 달리기의 지구력, 그 작은 점이 될 테니까 말이다.


대충 하루를 보내는 날도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아이는 앞으로 더 많은 학습량을 가질 것이고 결국 혼자서 그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아이의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가 공부하는 그 옆에 냄비를 들고, 프라이팬을 돌리며 결국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는 설사 제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아이에게 오늘 있었던 학교 일을 묻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에게 오늘의 일에 대한 감정을 물어봐야 한다. 아이가 그래도 공부하기 위해 앉아있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의 감정이다. 선생님에 대한 감정, 교실에 대한 생각, 친구에 대한 감정,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다.


희대의 살인마도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으며 그의 감정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 누군가가 있다. 나라면 절대 같이 못 살 것 같은 누군가도 그를 가장 이해해 줄 가족이 존재한다. 그 누가 그 사람을 어떻게 말하든, 인간관계에서 결국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듯, 아이가 가진 지금의 감정이 공부에 대한 아이의 '지구력'이 되도록 부모는 옆에서 그 감정이 행복하도록 응원해야 한다. 그것이 누가 말하는 8살 때는 무슨 문제집을 풀고, 무슨 학원을 가야 한다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이의 공부에 대한 감정이 행복하도록, 우리의 불안과 감정을 모두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 일로 멀리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때론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의 감정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금 알아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이가 배움에 무관심하지 않도록 그곳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오늘도 나는 아들에게 종종 선생님이 좋으냐고 물어본다. 그녀가 좋다고 말하면, 아이는 그 시간에 학교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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