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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Sep 15. 2021

그게 이스탄불 첫 모습이었다.

주재원의 아내로서의 삶의 시작, 그 우울한 출발

  그가 터키 이스탄불로 떠난 지 두 달 만에 우리 가족은 다시 만났다. 이슬람교의 기도를 위한 에잔이 확성기로 울리는 이곳에서 이스탄불로 떠나기 전 시간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 삶을 기록하려고 한다.

 

  2021년 7월 10일 혼자 터키로 출국했던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난 아이를 재우고 다시 혼자서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동안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한다. 지훈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내가, 지난 나를 그리고 나의 감정과 같은 지금의 당신을 위해서 나는 나의 그 불안하고 우울한 출발을 기록한다.




 2021년 9월 10일 밤 23시 50분.

 터키 항공의 비행기는 하늘에 올랐다. 코로나 19로 승객을 모두 태우지 못한 채, 3인이 앉아가던 자리에 아들과 나, 단 둘만이 그 자리에 앉았다. 마스크를 단단히 여미었고, 아들은 태어나서 처음 타는 커다란 국제선 비행기와 친정 식구와의 헤어짐에 오히려 신나서, 출발 전 그는 그저 질문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벌써 지훈이가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던 새벽 1시, 비행기는 출발 시간보다 늦게 하늘에 올랐고, 나는 그렇게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 19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KTX는 사라졌다. 기차를 타고 인천공항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삿짐이 오기 전까지 적어도 두 달이 걸릴 거라는 해외 이삿짐 업체의 말에 따라 내 짐 가방은 한 없이 커져갔다. 주재원 생활이 처음인 탓에 정보도 없었고, 알레르기가 심한 아들의 밥을 어떻게 먹일까 하는 고민에 이민 가방 속엔 마른 멸치, 명태포, 국산 어린이 마스크, 비상약까지, 코로나로 하염 없이 올라버린 화물비를 계산해도, 이민 가방은 정말 하염없이 커져만 갔다.


 지훈이와 나는 지방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도착한 후, 미리 예약한 콜밴을 타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오전 11시에 시작한 여정은 정말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코로나 예방접종 증명서를 제출하고, 음성 확인서를 들고 떠나던 그 길은 참으로 길고 멀었다. 항공사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맡기고 저녁을 먹고, 캡슐호텔에서 아이의 알레르기 반응이 걱정되어 샤워를 시키고 편하고 깨끗한 옷으로 그를 갈아입혔다.


 내가 출국장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친정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많이 바빴고, 나처럼 쉼 없이 땀을 흘리셨다. 아이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나를 대신해서 짐을 들어주셨고 나를 이끌어 주시려고 애썼다.


 친정 아버지는 지훈이에게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소의 아빠와는 참 많이 달랐다. 말을 듣지 않고 장난만 치던 지훈이에게, 너의 엄마는 할아버지 딸인데 네가 자꾸 그러면 네가 미워진다며 평소에는 하지 않으시던 말씀도 하셨다. 


 코로나 여파로 깜깜한 인천공항의 상점처럼 어두웠던 내 마음은 아빠를 붙들고 울고 싶었지만, 나는 그를 말없이 꼭 안고 웃으며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배웅하던 남동생 말에 따르면, 나와 지훈이가 들어가고 친정아버지는 그 곳에서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남편 없이 집에 전세를 주고 해외이사를 준비했다. 코로나 탓에 이사 일정은 변경이 잦았고, 내게 선택은 없었다. 알레르기가 심한 아들을 안고 혼자 밤을 지새우고, 준비를 위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곤 다시 바쁘게 정리를 했다. 그리고 먼지 가득 짐을 만진 탓에,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이 올까 봐서 또 정신없이 방을 닦아댔다. 그 모든 순간이 버겁고 힘들었다. 늦은 새벽, 계속 파이팅을 외치고 다시 짐을 싸고 정리를 하고 코로나 탓에, 알레르기를 가진 엄마인 탓에 나의 해외이사는 남들보다 별나고 불편했다. 먼지가 나는 우리 집, 아이를 재우고 치우고, 정리를 하고 그렇게 다시 불안한 잠에 들었다.


  이스탄불 공항은 참으로 컸다. 허브공항인 이스탄불 공항, 하루를 넘기고 이제 이틀에 접어든 긴 일정에 지친 지훈이는 텅텅 빈 이스탄불 공항 복도에서 못 걷겠다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일어서야 했다. 손에 을 든 채 아들을 업었다. 유모차는 화물로 구분되어 실린 탓에 속절없이 넓은 공항을 아이를 안고 걸어가야 했다.


 나는 혼자서 짐을 들고 모든 걸 해야만 했다. 누군가 필요했지만, 없을 때가 많았던 다시, 그 삶이었다. 고독 육아, 나는 언제나 아들과 함께였지만 참으로 외로웠다.




 아들과 함께 12시간의 비행 그리고 캐리어 2개, 이민가방 2개, 짐 가방 2개, 그리고 백팩 아이와 나 각자 1개씩, 그리고 손가방, 아이를 위한 유모차까지 이 모든 것을 혼자 들고 떠나는 나, 모든 게 안쓰럽고 걱정되었던 탓이었다. 알레르기를 가진 너를 데리고 떠나는 길은 다른 누구보다 걱정이 많았다. 덤덤한 친정 엄마와 달리 친정아버지는 긴 한숨과 답답함, 걱정을 이야기하셨다. 친정아버지의 그 모든 감정은 사실 나의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락다운이 지나간 튀르키예,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자 고급 주택의 가격은 코로나 이전과 달리 천정 부지로 올라갔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폭등을 맞이했다. 자연히 회사가 주는 예산만으론 예전과 같은 수준의 집을 구하긴 어려워졌고, 자비를 더해 남편이 알아본 국제 학교 근처의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튀르키예의 리라 폭락 시기에 들어온 임 주재원은 같은 금액으로 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니 현실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25년 된 낡은 집, 번화가 근처 녹지가 있는 정원이 있는 집, 지훈이가 새시를 세차게 흔들면 부서질 것 같은 창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넓기만 한 거실, 내가 외로울까 봐 개미와 거미가 걸어 다니는 집, 시간은 이 집에서 90년대 초반에 멈춰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면 녹물이 나오고, 아토피와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를 가진 나로선, 한국에서 새 아파트에 살았던 나로선 무엇 하나 더 좋거나 나은 것이 없었다.


  한국이 전셋값 폭등을 맞이한 것처럼, 지금 이스탄불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25년이 된 집이라 뜨거운 물을 틀면 누런 녹물이 나오고, 바깥 단지는 너무 예쁘지만 새시가 흔들면 흔들린다. 집 안의 웃풍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집 근처 국제 학교는 회사의 지원 외 연간 자비로 이천만 원을 쓰건만, 한국 국공립 어린이집 시설보다 열악하다. 그렇다. 이게 내가 만난 이스탄불의 첫 모습이었다.


  '난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앙카라 다음의 최대 도시에 있다. 그래, 서울 중심지에 있다. 예전 살던 한국의 삶을 찾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내어본다. 왜 내가 편안한 한국을 두고 여기 와서 이 고생이지 하고 불쑥, 겨우 4일째 이 집에서 살고 있건만, 한국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쉼 없이 떠오른다. 꾹꾹 누르면 내일 오는 쿠# 아저씨도 보고 싶다. 도대체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 여기서 좋은 것을 찾아야 하건만 지금 나는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가 고민이 된다. 아이 때문에 왔는데 학교에 가보니 학교가 이상하다. 국제 학교를 아이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었는데 학교는 예상과 달랐다.


 안타깝고 갑갑한 밤이다.


 신랑이 데려다준 멋진 베벡의 풍경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큰 대교도 지금은 멋지다고 말할 뿐, 나에게 에너지가 없는 것 같다. 이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계속 이곳에 있고 싶다고 이을 만큼의 마음이 없다. 고생하러 간다는 그 마음이 현실이 되니 더 어렵다. 이 마음을 다잡고 정리하는 일이 너무 어렵다.



 

지훈이는 예전 다니던 유치원의 이름을 말하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 00 유치원은 2등이야. 내가 이제부터 다닐 유치원이 최고 유치원이고 1등이야.'

 그래, 맞다. 네 말이 맞아. 그게 무엇이든 지금 내가 갖고 있고 하고 있는 것이 일등임을 잊지 말자. 훗날 이곳에서 생활을 그리워하며, 에잔이 울리고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익숙해져 이 집을 추억하고 기억하길 바란다.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다시 일어서기. 나보다 강하고 분명한 나의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멈출 수 없는 이 시작에서 같이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니 무엇보다 소중한 나를 위해서 좋은 생각을 잊지 말자고 되내어본다.

 피부에 두드러기가 나서, 피부를 막 긁으며 아하하하, 이렇게 난 지금 이스탄불에 있다.



덧붙임)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구한 집은 이 지역에서 아주 좋은 집 중 하나였습니다. 친해진 커피집 사장님이 저를 소개할 때, 시떼(아파트) 이름을 말하며 저기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세입자인 것만으로 대단한 곳이라는, 튀르키예의 최저임금을 살펴볼 때 이 집은 정말 비싼 집입니다. 지금은 지난 기간, 저는 열심히 닦고 남편이 많이 고쳤습니다.

 

 집은 여전히 예쁘진 않지만 개미도 없고,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여전히 물은 문제라 결국, 배송료 때문에 더욱 비싸진 한국산 연수기를 사용합니다. 주재원 출발 전이라면, 연수기 구매를 추천합니다. 내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흑흑흑흑.


이스탄불 공항과 보스포루스 해협


참느자 모스크와 참느자 타워, 이름을 듣곤 나보고 참으라고 하는 말인가 한참을 생각하게 했던 그 이름, 지훈이는 참 작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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