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에게 글을 쓴다는 건 사치였다. 한국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코로나 PCR 검사요원을 만났고 그리고 해외이사가 끝이 났다. 이삿짐 오기 전까지 아무도 아프지 않으면 된 거다라는 내 목표는 그렇게 빗나갔다.
튀르키예의 오랜만의 국경일 연휴였다. 신랑 일이 전산과 관련된 일이라 한국에서도 다른 사람이 쉬면 더 바쁜 그런 일을 한다. 그렇다고 남들이 일할 때 편해 보이지도 않는, 그는 한국에서 같이 저녁밥을 먹다가도 한밤에 쿨쿨 자다가도 전산이 멈출까 싶어 일어나 컴퓨터에 붙는다. 정말 그냥 그곳에 붙어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못 일어서는 것이었다.
신혼 때는 정말 이거 사기 결혼당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바쁜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내가 일을 하면 나를 도와줄 거야라는 생각은 '아하, 큰 착각이구나.' 하고 금세 알게 해 주었다. 연애 때 그렇게 나의 근무지 앞에 찾아오던 그 사람은 나도 그도 그 해가 결혼할 인연을 만날 해였는지 늘 야근을 밥 먹듯 하던 나도 그도, 그때 우린 처음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우린 이스탄불에 왔다. 여기에 왔다고 그의 삶이 별 수가 있겠는가. 그는 또 튀르키예 국경일에도 회사에 일하러 갔다.
"잘 갔다 와, 운전 조심하고"
"우리도 남들처럼 여행 갈까?"
"이 시국에 뭐, 괜히 갔다 와서 몸살 해. 집에 있자. 잘 다녀와 신랑."
피곤할 그를 알기에 우린 그렇게 집에 있었다. 이스탄불 집 앞의 동네를 걷고 집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필요할 비상약인 에피렌 주사를 준비할 병원을 알아보며 연휴를 보냈다. 그리곤 그가 연락이 왔다. 아프다고 한다. 연휴 때도 출근을 하고 업무를 마치면 늦을 것이라며 회사 근처에서 자고 온 그는 갑자기 아프다고 말한다. 평소와는 뭔가가 많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웬, 설레발이야."
나는 사실 그를 다그쳤다. 그렇게 다시 그는 출근하곤 전화가 왔다.
"지훈이 엄마, 확진이야."
그러곤 그는 2주간 회사 근처에 있는 회사 숙소에 격리되었다.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지만, 다시금 같은 튀르키예 하늘 아래에 있었으나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아이는 그렇게 아직 이삿짐도 오지 않은,소리가 울리는 텅텅 빈 집에서 PCR 검사를 받았고, 아이는 코 안을 깊숙이 찌르는 솜방이를 보며 검사가 무섭다며, 목청 터져라 울어댄다. 발버둥 치는 지훈이를 다시 한 번꽉 잡아, 현관 앞에 검사원이 한 번에 지훈이의 코를 찌르도록, 있는 힘껏 아이를 잡는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곤, 남편이 쓴 모든 물건을 소독하고 세탁하고 그리곤 우리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혹시나 뒤늦게 증상이 나타날까 싶어 긴 격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이와 나는 음성, 그리고 격리 시작 후부터 큰 증상 없는 남편. 그러나 분노는 그의 격리가 거의 끝날 시점, 여전히 집 밖에 있는 그와 이삿짐 날을 잡으려는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화.
나는 아이 학교도 안 보내고 데리고 있건만 다들 오자마자 떠나는 여행도, 화려한 외식도, 가족 모두의 건강을 위해 참았건만 나의 눈에서 몸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뛰쳐나왔다.
지난 6월부터 그는 내게 말했다.
우린 터키가니 여름휴가도 가지 말자.
우린 터키가니.
우린 터키가니까.
내가 터키 가야 하니까.
그렇다. 난 이미 지쳐있었다. 튀르키예 땅을 밟던 그 순간부터 난 이미 그의 떠남과 그의 준비에 의해 계획된 삶에 지쳐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쓸 여유도 없이, 아니 다시 편히 잠을 잘 여유도 없이 삶의 적응에 지쳐있었다.
남편도 없이, 제대로 된 살림도 없이 터키어도 모르던 나에게 아이와 올 곳이 보내는 2주간의 시간은 나의 분노와 감정을 오르내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차가운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지쳐있었다. 코로나 19가 할퀴고 간 상처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의 막막함은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집에 돌아오고 우린 정말 대판 싸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이 싸운 게 아니라 내가 막 퍼부운 거지만, 일말의 반격할 수 없는 그에게 나는 평소에 하지 않는 말도 던졌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해."
그렇다. 난 남들이 사는 것처럼 안 살았다며 그에게 소리치고, 너에게 화낼 권리가 있다며 마지막 분노를 던지고 그와의 싸움에서 나는목놓아 엉엉 울었다. 나는 남들이 보기엔 내가 이싸움에서 이긴 것 같지만 역시 울고 있는 건,나였다. 여기서 살아내야 하는 것은 나이기에 이 싸움은 결국 어느 누구도 이긴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신랑이 많이 아팠다면 나의 분노가 없었을까 하고 다시 내게 되물어본다. 남편이 확진되고, 튀르키예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 그는 나와 아이를 놔두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격리되었다. 나는 운전도 못했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삿짐도 오지 않은 이곳에서, 아이와 내가 갑자기 응급 상황이 올까 봐 불안했다. 그 불안을 잘 참고 아이와 아무 일 없는 듯, 잘 견디는 게 일이었다.
호흡기 질환을 가진 나 그리고 알레르기를 가진 아들을 데리고, 신랑 외엔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확진자가 나온 집, 누구도 오고 싶지 않을 집이 된 상황에서 나는 아들과 단둘이 살아내야 했다. 아이가 아프면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하고 마음속은 요동쳤지만, 그에게 잘 쉬고 오라고 얼른 나으라고 덤덤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난 덤덤한 척 웃었지만, 소식을 전해 들은 영상 통화 속 친정아버지는 눈물을 훔치셨다. 불안한 듯, 나를 보며 아프지 말라는 친정 아버지의 말이 가슴을 후볐다.
코로나 19 확진, 튀르키예에 오고 처음 만난 최대 고난이었다. 튀르키예 집에 오자마자 하수구는 터지고 냉장고 멈추고, 아들과 나 단 둘인 공항에서 나 혼자 알레르기 아들을 위해 싸온 짐 5개를 들고, 아이는 힘들다며 앞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터키 공항 왜 이리 크냐며 크고 넓은 것에도 화가 났다.
그래도 괜찮다 다 왔다. 조금만 힘을 내면 된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 괜찮다. 나는 나를 그리고 아들을 달래며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터키다. 이제 도착했다. 그래도 우리 집이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나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나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분노를 터뜨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계획한 그의 일과 나의 삶의 변화에 지쳐있었다. 많이 지쳐있었다. 그때의 나는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지났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독하게 힘들다 하더라도 시간은 지나간다.
혼자서 쉼 없이 한국에서 지훈이를 재우곤 밤을 새워서 별도로 짐을 쌓던 아이의 옷과 아이의 물건들, 아이의 책, 장난감 그리고 그릇, 가구, 전자제품들 모두가 잘 왔다. 모두 이상 없이 우리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그동안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듯, 지훈이와 나보다 먼저 한국에서 튀르키예로 출발한 이삿짐은 70여 일이 지나 도착했다. 그리고 확진된 그도 격리를 마치고 16일 만에 튀르키예의 우리 집에 왔다.
먼바다를 넘어 한국에서 이삿짐이 이렇게 잘 온 것처럼, 지척의 그도 2주를 혼자서 보내다 우리 집에 왔다. 그리곤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국에서 온 이삿짐을 풀고 정리를 하며 그리고 지쳐서 서로를 바라본다. 아이는 예전처럼 킥보드를 타고, 나는 여전히 짬짬이 계속 이삿짐을 정리하고 그리고 다시 세탁하고(본인이 풀어야 하는 해외이사) 아주 평범하고 지루하지만 소중한 그 일상과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아 이제 정말 이사 싫다 신랑아, 근데 한국 가려면 한 번 더 이걸 또 해야 하네."
코로나 19, 이사를 다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닦아야 하는 이 현실. 그래, 우리 액땜 이제 다 했다. 이제 아무도 안 아프면 된다. 나는 다시 튀르키예의 삶을 시작한다.
그렇게 싸웠다가 퍼부었다가 다시 불쌍해서 서로를 바라봐주며,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스탄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