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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서 효과
-쓰느냐 마느냐 읽느냐 마느냐-
by
이티ET
Feb 7. 2024
가끔씩
티브이에
나오는 부부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밖에서 놀다 지쳐
새벽녘에 들어온 남편에게 받은 각서로
온 집안을 도배하고도 남을 정도라며
울분을 토하는 아내를 본다.
얼마나 속이 터질까.
그런데 각서 쓸 일 없이 겉보기에 착실한데
끊임없이 속을 썩이는 남편들도
꽤 된다는 사실에 각서 아내들은
위안이 좀 될까.
그런데 각서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
왜 그렇게 많은 각서를 쓰나 변하지 않는
걸까?
그것은 먼저 각서를 대하는 두 당사자의
태도와 의미 부여
내지 종이 한 장의
체감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쪽은
각서에 대해 의지와 마음과 변화의
태도를 담아 진중하게 요청했을 것이고,
상대방은 종이쪼가리 한 장에 스스로
값싼 면죄부를 발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불평등조약은 끊임없이 남발되고
한 사람은 끊임없는 희망고문을.
다른 한 사람은 끊임없는 얄팍한
자유의 날개를 펴고
찌
질한 재미로
지루한
일상에 작은 즐거움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ㅌㅌ
각서 한 장에 인간이 변화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집만 도배하나?
세상의 모든 벽을 도배하도록
많은 이들에게 권했겠지.
본디 나는 스스로를 반성문과 각서를
열 장정도는 영혼 없이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다 자부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청소년 반성문
작가였다.
고 1 어느 날, 매번 조금씩 지각을 일삼던 나를
겨냥한 표적 수사가 시작되던 날.
눈치코치도
없고 식견도 없는
나란 아이는
오직 발달한 촉 하나로 그날따라 일찌감치
등교했다.
담임은 그날 작정하고 출석부와 몽둥이를
들고 교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교실문을 들어서며 이 상황이
뭔지를 살피는데 먼저 온 아이들의
낮은 함성이
들려왔다.
-우우우 와~
그 소리는 너는 왜 벌써 왔냐?
오늘따라. 너 뭐 알았냐?
담임 또한
나를 못내 수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결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날을 잘못 선택한 담임의
실수였다. 평소에 늘 점검을 하시던가.
그러나 며칠이 못 돼 정문 앞 개구멍으로
운동장 가장자리 나무 밑을 나무처럼 위장해
교실로 진입하던 날 꼬리가 길어 드디어
담임에게 잡혔다.
-요놈, 드디어 잡았다.
맞네. 날 잡으려던 것이었군.
-죄송합니다.
(음메 기죽어!)
쓸이랑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과가 빠르다는
것이다. 진심일 때도 많은데
사람들은 빠른 사과에 당황해서 더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진심인데.
다행히 수학이 전공인 담임은 내 사과는
귀로 받으시고
하교 전까지 반성문 10장을 써 오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왜냐고?
난 뭐든 길게 쓰는 건 자신 있는 애였다.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
종이와 샤프를 꺼내
단숨에 레포트지 10장에 반성문을
교정부호까지 써 가며 꽉 채웠다.
지각한 다른
아이가 부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다.
비슷한 내용이라도 있을 경우 괘씸죄로
가중처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난 일찍 집에 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점심시간에 담임에게 반성문을 들고
찾아갔다. 담임은
교무실 소파에 나를 앉으라 하고는
차근차근 경상도 억양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니 평소에 매일 늦는 거 알고
있는데 용케 불시검열 피해 간 거 알재?
(알재)
쓸이랑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웃지 마라. 내 이번만 봐 준다카이.
반성문 보자.
(맘에 들걸?)
쓸이랑은 확신했다.
담임은 반성문이 재미있는지 단숨에
읽어 내렸다.
-니 밥 해묵고 다니나?
-아닌데여.
-여기 아침밥 묵느라 늦었다매?
-아, 밥을 먹기 전에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머리 감고 밥 먹느라 늦는다고 쓴건데요.
-니 장난하나?
-아닌데요.
(거봐, 내가 진실을 쓰면
화낼 거면서
왜 반성문을 쓰래?)
-알았다, 니 앞으론 절대 늦지 마라.
반성문을 성의 있게 써서 내가 한 번만
봐 주는 거다.
-네에~
반성문, 각서, 기타 등등
나는 종이 쪼가리에 무슨 결심 따위
적는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나를 보며
어린시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별로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그런 걸 써서 전했다면
그건 정말 미안하고 반성하기 때문이란 걸
알아줬음 싶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
쓸이랑은 각서 따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받을 생각이
없다 물론 써 주지도
않는다.
언젠가
사고를 친 상대에게 각서가 아닌
경위서를 요구한 적이 있는데 보다가
화가 더 나서 한 대 팰 뻔했다.
역시 종이쪼가리 위의 변명 따위와
나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부터 나 자신에게
각서를 하나 써 준다.
마음을 단디 묵자!
각서 따윈 안 받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써 준다.
여태 실천 못한 그것.
오늘부터 하나씩 실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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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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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페르소나로 일상을 글로 쓰고 싶습니다. 여기에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꿈은 곧 소설가, 현재는 글 쓰며 무언가를 가르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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