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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16. 2019

1.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며

왜 육아를 배워야 하는가?

 오늘날의 세계는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고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인종차별, 계급, 노동자, 소비, 통신, 주거, 인권, 법률, 과학, 사상적으로 100년 만에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전에 용인되던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오늘날엔 죄악시된다. 그 가운데 여전히 인간의 삶 속에 최소한의 변화만 둔 채 오랫동안 남겨져 있는 것들이 있다. 남녀의 사랑이 그러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것들이 그러하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노화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종류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시각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사물보다는 움직이고 활동성 있는 무언가를 훨씬 빠르게 잡아내가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여전히 우리는 빠르게 변화고 움직이는 것들에 모든 집중과 시선을 빼앗긴다. 정지되어 있는 듯 보이는 것들은 이전에 그러했듯이 우리에게 큰 관심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산소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의 관심을 얻지 못함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나고 양육되고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늙어 죽는 과정은 이젠 너무나 보편적이라 요즘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듯하지만 생물로서의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정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풍요로워 보이나 삶 자체는 각박해져가고 있는 듯해 보인다.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 올라서야 산소의 중요성을 알게 되듯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들이 어려워지며 이제야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국가는 출산율을 유지하고 적절한 인구 모델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정책들을 펴고 있지만 역부족인 듯하다. 20대 청년들은 집을 얻는 것과 양육의 어려움으로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결혼조차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가 어머니들을 사회로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장려하고 여성의 인권신장으로 자아 성취를 위해 직업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이 커지며 어머니로서 자녀를 키우는 것에 대한 중요도가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업주부를 무능력하고 주체성 없는 여성이라는 시각도 일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출산 후 아이를 양육하며 산후우울증을 겪거나 경력 단절녀가 되어 슬픔에 빠져 있는 엄마들이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육아의 위대함과 중요성은 간과되고 있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이제 부모에게 짐처럼 여겨진다.


 산소가 항상 주변에 있기에 우리가 산소의 중요성을 간과하듯 육아의 중요성 역서 저평가되고 있다. 육아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해왔고 인류의 마지막 한 명에게 까지 행해질 것이다. 출산할 때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육아 없이는  그 어떤 아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가정에서의 육아는 인간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내고 아이의 인생 전체와 죽음에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이다.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육아의 합은 각 문화와 관습의 토대가 되고 사회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아에 대한 관심도는 여전히 낮으며 서점에는 육아에 대한 지엽적인 방법론으로 가득 찬 서적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육아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스스로 육아에 대한 자신 있어한다. 우리의 인생이 오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받았던 육아법 역시 오답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육아법 그대로 자녀들을 양육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가정에서 가정으로 내려오는 가정의 전통과 유사하다. 이러한 가정의 문화를 특정 하나의 문화만 정답인 양 책으로 써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웃긴 일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필자는 육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편협함으로 자신의 육아법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자. 우리 스스로가 부족함 많은 인간이듯 우리의 육아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멍 난 휴지처럼 체계적이지 않고 조밀하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육아법과 육아 경험을 스스로의 사례와 대조하고 비교하며 정답에 가까운 육아 방식을 배울 수 있다.


 한 예를 들자면 이러하다. 나는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다. 마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집을 지어 본 경험이 있다. 아버지가 나에게 집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다 문득 나는 스스로가 집을 짓는 방식이 좋은 방식인지 알고 싶어 졌다. 우선 나는 옆 마을의 목수를 찾아갔다. 옆 마을의 목수는 나와는 다르게 참나무를 사용해서 집을 짓고 있었다. 집의 형태도, 재료도, 방식도 나와는 달랐지만 누구의 방식이 정답인지 알 수 없어졌다. 다음날은 시내로 나갔다. 시내의 사람은 나무보다는 벽돌을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 나의 방식보다 체계적이며 많은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집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 이렇게 집을 지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은 서점에서 집 짓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사서 공부했다. 책에서 우리 마을에서 사용하면 좋을 몇 가지 기술들을 배웠다. 하지만 책의 방법도 정답은 아니었다. 나는 실망해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가지 새롭게 배운 기술들을 접목시켜 보니 이전의 집보다 더 살기 편하고 안락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육아도 위의 목수의 집 짓는 것과 유사하다. 개인의 육아법, 개인의 환경 모든 것이 다르다. 도시의 집 짓는 방식을 시골에 그대로 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부잣집 육아법을 가난한 집 육아법에 대입할 수 없고 유대인의 육아법을 한국의 육아법에 대입할 수 도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육아 경험을 보고 전문가들의 육아법을 공부하여 우리의 자녀에게 더 좋은 육아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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