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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16. 2019

2. Chapter 1. 아이 그전에 나

나, 아내 그리고 아이

 어린아이는 보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른들의 단단한 뇌와는 다르게 아이의 뇌는 스펀지 같이 보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역량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스펀지가 되어 가장 먼저 보고 배우는 은 부모의 행동이다. 아이들은 눈에 비치는 부모의 모습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받아들인다. 우리 부모들의 모습과 말, 행동들이 모두 아이의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책들이 부모의 말과 행동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것을 권장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아이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들고 싶다면 그전에 부모가 책을 읽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서가 즐겁고 유익한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아이들에게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다. ‘똑똑한 아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아이’, ‘행복한 아이’,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아이’ 등이 예이다. 하지만 당신이 ‘똑똑한 부모’,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부모’, ‘행복한 부모’,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부모’가 아니라면 아이는 어떻게 당신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말인가?


 아이가 똑똑하길 원한다면 공부하며 책을 읽어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며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스스로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아이에게 교육이라는 것은 말로 행복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아의 시작은 자아성찰과 가정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다면 내 아이 또한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는 부모의 많은 것을 닮아 간다. 외모부터 작은 습관까지 부모의 것을 모방하여 닮아간다. 4살 된 딸이 나와 같은 포즈로 옆으로 와서 누울 때는 나도 깜짝 놀랐다. 작은 습관과 말투가 내 절반의 유전자를 가져갔기 때문인지, 나를 보고 배웠기 때문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닮아가듯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서 육아는 시작된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가 왜 그 모습들을 기대하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보자. 나의 어린 시절 부모가 어떻게 당신을 키웠으며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역할을 하며 나의 어머니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떠올려 보자.


 나는 어린 시절을 대가족 체제에서 보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 삼촌, 동생까지 한 집에서 생활해 왔다. 그래서 단체 생활에 쉽게 적응하는 면이 있었다. 부모님은 뒤늦게 도시로 나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아서 학교 다닐 때 가지고 싶었던 것이 있어도 쉽게 부모님께 말하지 못하고 참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하고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었고 늘 남에게 요구하기보다는 양보하는 쪽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지만 나는 자존감이 낮은 편이었다.


 그렇게 자란 내가 어른이 되어서 내 아이가 자신감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삼키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였겠는가? 그때 나는 속상하면서도 아이가 어쩐지 불쌍한 느낌이 들어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아이를 격려한 것이 아닌 아이의 모습에 보이는 어린 시절의 나를 격려한 것이다.   


 나를 닮은 내 아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내 어린 시절을 보게 될까? 그때마다 당신은 어린아이가 된다. 화가 날 때도 있고 불쌍할 때도 있으며 행복할 때도 있다. 만약 내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면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많은 상처를 다시 받고 아이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것은 좋은 육아는 아닐 것이다. 사실 아이와 나는 다른 존재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이와 나를 동일시할 때가 많다.


 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내 욕구를 아이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책들이나 전문가들이 경고한다. 과한 투영 그 자체는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투영하는 행위가 결코 이원론적이기보다 하나의 스펙트럼에 가깝다고 본다. 아이에게 나를 많이 이입할수록 아이는 불행해 지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에게 이입하지 않다면 아이에게 공감해 주기도 힘들 것이다. 그것은 ‘남’인 관계이다. 아이 고유한 가치와 내면을 존중하며 아이를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이상적인 부모의 거리감일 것이다.      


 그렇기에 육아 그전에 나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자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아이와 적절한 거리감을 둘 수 있으며 아이가 내가 이루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아이 스스로의 삶을 살도록 권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 성찰이라는 과제 자체가 일순간 이루어지는 결과가 아니며 삶의 전반에 걸쳐져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태도나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다. 나는 그렇기에 자아성찰을 이루고 육아를 하는 것이 아닌 자아성찰의 태도 그 바탕에 육아를 행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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