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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22. 2019

부모가 된다는 것

 군의관의 삶은 꽤 여유롭다. 병원에서 전공의로 열심히 뛰던 시절과 비교하면 천국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혼자 진료실 안에 앉아 생각의 숲을 거닐기 좋아하는 나에게 전공의 시절 만났던 환자들은 나를 미소 짓게 하기도 하고 때론 반성하게 하기도 한다. 특히 그 당시의 나는 교만하고 편협했으며 게을렀다. 우리 병원의 재활의학과는 주로 뇌에 문제가 생겨 후유증이 생긴 사람들이 많이 온다. 환자들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주를 이루지만 태어날 때부터 병을 가진채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뇌성마비를 지닌 어린아이들과 불의의 사고로 뇌를 다친 젊은이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환자들 중에 한 모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준이를 처음 병원에서 만났을 때는 영준이가 만 13세쯤 되었을 때였다. 3년 전 불행한 교통사고로 인해 영준이의 뇌 영상을 보면 곳곳에 상처로 가득하다. 그런 만큼 영준이의 팔다리의 근력은 미약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모든 것을 보호자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완전 의존' 상태였다. 이미 몇 년 간 재활을 받아오던 환자고 내과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환자였다. 사고 후 3년이 지난 상태면 입원 치료보다는 통원 치료를 권유하고 사회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공의 시절의 나는 왜 영준이를 입원시키는지 사실 이해하지 못했다.


 주치의로서 본 영준이는 밝았다. 뇌를 다치게 되면 많은 환자들이 세로토닌 레벨이 낮아지고 현실을 비관하며 우울해한다. 발병기간이 길어서 인지 아이라서 그런지 영준이의 멘털 상태는 밝고 순수했다. 회진 때도 동생 같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둥 사담도 많이 했었다. 영준이는 특별히 악화되지도, 좋아지지도 않는 항상 비슷한 환자였다.


 영준이의 보호자는 영준이의 엄마다. 영준이에게는 남동생이 있어 아빠는 남동생을 주로 케어하고 엄마는 항상 병원에서 영준이를 간병했다. 영준이의 엄마는 매우 밝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는데 병실의 주변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말도 많고 병실을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이었다.


 영준이가 한 번은 서울에 줄기 세포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하고 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줄기세포 치료는 제대로 인정받고 있던 치료는 아니었다. 영준이 엄마는 아직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고지식한 나는 줄기세포 치료에 대해 회의적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담당 과장님은 그저 잘 받고 오라고 격려해 주셔서 속으로 눌러 참았었다. 영준이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준이 근력을 체크했으나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영준이 엄마는 "좋아지죠." 하며 웃을 뿐이었다. 영준이는 인터넷 강의도 듣고 공부도 했다. 수학은 아무래도 손을 쓸 수 없기에 잘 못한다고 한다. 아마 뇌의 손상 부위가 많아 학습 능력도 또래와는 달랐을 것이다. 영준이는 그저 나에게는 착하고 문제없는 좋은 환자 중의 한 명이었다.


 내가 전문의 자격시험을 치르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딸도 많이 자라 5살이 되었다. 딸이 커 가는 것을 보며 딸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도 커지면서 가끔 영준이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녀 마음의 아주 일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사지마비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웃음으로 간병하는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웃는 영준이 엄마의 마음에서 나는 당시 신기하게도 아무런 절망도 슬픔도 사실 느끼지 못했다. 자기 인생을 비관하거나 신을 원망하거나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고 그저 의연히 아들과 치료를 받으며 오늘을 살아갔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일 거라 생각한다. 내 자녀가 고통받는 것보다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영준이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사지마비가 된 영준이를 본 엄마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그녀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아들과 농담하며 재활치료를 같이 받으며 오늘을 보낸다. 아픈 자녀는 부모를 강하게 만든다.


 신은 왜 인간에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준 것일까? 그러한 관계가 없다면 인간은 보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비혼 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적은 돈으로 만족하며 나를 위해 살 수 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진정한 의미는 나와 글을 읽는 당신도 자녀를 키우며 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자녀의 존재는 자녀가 아프던, 결함이 있던, 뛰어나든 간에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그 귀한 선물을 우리는 함부로 키우고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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