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_스트릿 출신
우리 집에는 길에서 온 동물같이
길에서 온 식물들이 있다.
aka. 식물 저승사자인 내가 집에 식물을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저 물 주고 햇빛 쐬어주는 게 전부다. 식물은 아프다는 소리 한번 못 내고 소리 소문 없이 죽어버리기에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절대 식물을 들이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내가 하나 둘 식물을 늘리게 된 건 길에서 만난 녀석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푸코와 집 앞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들어가던 중 길에서 뿌리 뽑혀 널부러져 있는 식물 하나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너무나도 멀쩡한 녀석이 길바닥에 누워 '나 좀 살려줘. 데려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추측 건데 수종이 예쁘지 않아서 버려진 것 같았다. 처음에 집어 들고는 뿌리가 여기저기 엉성히 나있어 당황했던 걸 보면 말이다. 급하게 산 플라스틱 화분에 흙을 채워 넣고 집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도대체 무슨 식물인가 싶어 식물 박사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셀렘이에요.'
그녀는 식물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셀렘은 우리집에 잘 자리 잡아 그의 출신지인 '서울숲의 정수'이라는 애칭을 얻고 이사 갈 때마다 함께 이동하고 있다. 처음엔 참 볼품없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집 한켠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늘 작은 화초를 키워서 죽이기 일쑤였는데, 셀렘은 생각보다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식물을 키울 자신은 없기에 나의 유일한 이 반려식물에게만 애정을 쏟기로 했다. 영양제도 꼽아주고 바람이 잘 부는 날이면 창가에 살짝 내놓아 바람을 쐬도록 해주었다.
'그래 집에 식물 하나 정도 있어도 괜찮지.'라며 첫 반려식물을 들인 것이다. 독특한 수형으로 멋들어지게 자라는 녀석을 보면 괜히 뿌듯하다. 우연히 지인의 집에서 정식으로 구매한 '셀렘'을 보게 되었는데 우리 집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 뭔가 모자란 구석 때문인 건지, 돈 주고 살 수 없는 모양 때문인 건지, 아픈 시절을 잘 겪어내 줘서 그런 건지 우리 집 녀석도 꽤 멋져 보인다.
그리고 또다시 내 계획과는 달리 새로운 반려식물들이 생겼다. 이사 다닐 때 책만큼이나 번거로운 게 식물이다. 흙이 떨어질 수도 있고 자칫 뿌리나 줄기가 흔들리게 되면 빌빌대다 다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은 언제나 틀어진다.
가게를 정리하는 분께서 공간을 채웠던 식물들을 내놓으셨다. 녀석의 역할은 그 공간에서의 ‘쓸모있는가’와 함께 끝났다. 커피 한잔 값을 지불하고 시들시들한 야자를 데려왔다. 무슨 야자 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그렇게 생긴 녀석들은 다 야자 같다. (후에 야레카, 테이블 등 다양한 야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큰 화분이 처음 생겼다. 이사 갈 때 또 후회하겠지만 방 한편에 큰 야자가 잎을 드리우고 있으니 여행지에 온 것 같은 맛이 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잎이(줄기랑 연결돼서 잎인지 줄기인지 모르겠다.) 고작 5~6개밖에 되지 않아서 하나하나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어디에 존재해도 공간을 사뭇 다른 분위기로 바꾸어주니 집의 어느 공간과도 잘 어울린다.
집에 반려식물이 늘어나니 무엇보다 집에 ‘생기’가 도는 게 느껴진다. 아무 소리 없이 식물들은 제자리에서 생명력을 뿜어낸다. ‘이 공간에 살아내고 있는 게 나와 푸코 외에도 여럿 있구나.’하는 마음. 식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는 시들시들한 잎으로 때로는 새로 난 야들야들한 잎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나의 작은 가설이지만, 식물이 잘 생장하는 곳은 인간이나 동물도 살기 좋은 곳이라는 귀납적 추측을 해본다. 채광이 좋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식물을 놓아두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녀석들이 튼튼하게 자란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나나 푸코 역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건강히 무르익는다. 축축하고 우울했던 머릿속 공기들이 뽀송뽀송하게 말라서 산뜻해지는 게 느껴진다.
마침 요즘 ‘플랜테리어’라는 게 유행이라 그런 지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식물이 멋들어진다는 얘기를 건네면 괜스레 뿌듯해져 ‘얻어온 녀석들이야. 꽤 잘 컸지?’ 하고 너스레를 떤다. 푸코도 두부도 식물들도 어느 것 하나 처음부터 예뻤던 녀석은 없었다. 다들 쓸모없어졌거나 혹은 버려졌던 녀석들인데 생의 또다른 국면을 나와 함께 맞이해주고 있다.
이상한 취향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토록은 무용의 더미에서 반짝임을 찾아내는 걸 좋아한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을 하는 그는 이런 반짝임을 찾아내는 능력치가 어마어마하다.) 우리 집에 온 녀석들이 새로운 반짝임을 드러내는 걸 보며, 우리의 시간과 하루도 함께 반짝인다는 걸 실감한다. 여기저기서 모인 어설프고 엉성한 것들이 새로운 지반을 토닥토닥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어느것도 어떤 이유로도 버려지지 않을 그런 행성. 그리고 그 어디서도 마주하지 못할 새로운 반짝임.
덧
권정민 작가님의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를 강추합니다. 그 책에 푸코 닮은 녀석도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