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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Oct 09. 2021

미니멀리즘을 꿈꾸며 가을 옷과 캣타워를 산다.

EP14_정착을 꿈꾸는 부레옥잠들

성인이 되고 우연찮게 이사를 여러 번 다녔다.

(전혀 우연치 않고 모두 의도적이다.)


'짐을 만들지 말자.'라는 다짐은 늘 무너지고 이삿짐을 쌀 때만 되면 집에서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는 녀석들을 버린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니니 환경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체력과 경제생활을 위해서 소비를 가급적 줄이자는 도덕교과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운이 좋게, 소비를 많이 줄였고 다른 이들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가끔 나눠줄 수 있게 되었다.


뚱부의 물건들.

그럼에도 이삿짐 싸는 건 정말 힘들다. 내가 생각하는 이사할 때 가장 번거로운 물건은 책과 식물인데,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고 연약하고 짐스럽다. 이삿짐 센터에서도 책 포장용 박스를 따로 주실 정도이다. 이번 이사 때는 열심히 모았던 그림책을 모두 둔치(미술 유학원)로 영구보관 위탁했다. 식물은 어쩔 수 없이 자가용으로 옮긴다. 과속방지턱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흙들이 여기저기 차 바닥에 흩뿌려질 것이다.


이사하기 전 최대한 짐을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집에 식구가 늘어나자 예상치 못한 짐들도 같이 늘어났다. 바로 푸코와 두부의 짐.


푸코는 다른 강아지들에 비해 자기 물건이 적은 편인데 정말 기본적인 것만 해도 한 상자였다. 사료그릇, 하네스, 우비, 죽은 털 고르기 빗, 간식들, 각종 영양제, 멋쟁이 반다나, 마약 방석, 킁킁 담요까지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한 짐이다. 또 버리기도 다시 사기도 애매해서 한숨을 푹 쉬며 짐을 쌌다. 자기 물건들을 집어 들면 혹시나 간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푸코가 짐 싸는 옆을 뱅글뱅글 돈다.

아휴 정신없어. 마지막으로 이동장에 담긴 푸코(중형 10kg+ 이동장 무게)는 큰 짐 한 상자 분량을 차지한다. 이렇게 패키징을 하면 푸코의 이사 준비가 끝난다.

마약방석 못 잃어

그리고 고양이는 더 하다.

캣타워가 거의 한 가구 분량을 차지하니 말이다. 내 책장보다 큰 캣타워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건지 꽤 무겁다. 이사 견적 낼 때 큰 가구들을 보통 적어서 보내는데, 캣타워를 다음부터는 꼭 포함시켜야겠다고 자책했다. 고양이는 화장실과 모래도 만만찮다.


여러모로 짐도 많은데 무엇보다도 영역 동물인 고양이가 영역을 옮기는 일이기에 푸코의 이사보다 두부의 이사는 더욱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동장에 들어갈 때부터 난리인 두부를 순식간에 새 공간에 옮겨야 한다. 저승사자가 저승으로 끌고 가는 것처럼 두부는 운다. 왜야오오오오오오오옹-

이동하는 차 안은 푸코의 켄넬, 두부의 켄넬, 그리고 비닐봉지로 잔뜩 싸인 식물들을 싣고 두부의 괴성을 BGM 삼아 시속 30킬로를 유지하며 달린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설렘을 품고.

두부야,, 왜 캣타워에서 안 자..?

이사 후 한동안 푸코는 설사를 했다. 알게 모르게 생활공간이 바뀌면 동물들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인간만 힘든 게 아니었다. 물론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짐을 풀고 은행을 오가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 건 사람이지만, 동물 입장에서도 잘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새로운 구조와 체취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니 스트레스일 수도 있겠다.


이사 가는 동네를 정하는 조건 중 '강아지가 산책할 곳이 있는가?' 였기에 집 정리를 대충하고 푸코와 동네를 탐방했다. 그래서인지 며칠의 속앓이 후 푸코는 잘 적응해주었다. 녀석의 떠돌이 생활이 어쩌면 적응력을 높여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인간 중심적 추측을 시도한다.


웜톤과 쿨톤 사이. 정리 안 되는 옷가지들.

인간인 나에게 삶의 영역을 바꾼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직장과의 거리부터 치안, 단골 빵집까지 '주거환경'의 변화는 외부의 힘으로 한 사람을 통째로 흔드는 일이다. 인간이 최적의 환경을 찾는 데는 너무나도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단순히 '집'이라는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직주접근성, 학군, 교통, 투자가치 등등 온갖 기준들이 세워진다. 그 촘촘한 체에 거르고 걸러져 살아남은 곳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푸코와 두부에게 삶의 영역이 바뀐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들에게 최적의 장소일까.


출근도 안 하고, 범죄에 노출될 일도 적고, 맛있는 빵과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녀석들이 살면서 정말 필요한 건 뭘까. 자기 온 식구가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그리고 각자의 영역이 어느 정도 분리되는 그런 공간이면 충분할 것이라 결론지어본다. 상대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삶이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 힘을 많이 쏟는 건 아닌지.

매번 가벼워지자, 덜어내자고 하면서 가을 옷을 구경하는 내가 모순되다. 노마드의 삶을 꿈꾸면서 내 집 마련의 꿈도 중첩되게 꾸는 나는 참 모순되다.

내 집 마련은 당분간 어려워도 두부 숨숨집은 마련해보자고 인터넷을 뒤지고 있는 나도.


그럼에도 깐깐한 내 기준으로 거르고 걸러 구한 새로운 공간에서 다들 반짝거리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감사하다. 부레옥잠 같은 삶을 꿈꾸지만 사실 나는 녀석들과 어딘가에 깊게 뿌리내리고 싶다는 걸 나는 안다.

두부의 숨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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