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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탈북자' 나도 내가 싫다

정착 초기에는 내가 살아내야 할 세상이 철창 없는 감방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하나원을 나오면서 인천의 임대아파트를 배정받았다. 빈집에서 첫날을 보내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 먹고살지?’


하나원에서 지하철 타는 법, 은행에 돈 넣고 빼는 방법을 배웠다. 그게 다였다. 남한사회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설교를 늘여놓았다. 하지만 귀에 담기지 않았다.

몇 달을 멍한 상태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사방이 빙글빙글 돌다가 캄캄해졌다. 의사는 ‘신경성 위염’은 병도 아니라며 안심시켰다.


이듬해, 기독교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하면서는 중국에서 만난 하나님을 더 잘 배워 통일 후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포부도 다졌다.

새내기인 첫 학기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강의실을 찾아다니고 교수의 강의를 알아듣는 것부터 도전이었다. 15살이나 어린 동기들과 팀 과제를 준비하고 개인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러냈다. 다음 학기도 다르지 않았다.

두 번 휴학계를 내고 2학년을 겨우 마친 뒤 퇴학 신청서를 제출했다. 2년간의 대학교육은 나의 신앙과 인생에 도움보다 마이너스가 된다고 판단되었다. ‘대졸자’라는 인증을 받기 위해 앞으로 2년을 더 공밥 먹느니 중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무 자르듯이 쉽게 잘라버리느냐고 질타했다. 

남들과 다른 고향을 가진 나, 같은 듯 다른 내 모습이 모두에 속하지 못하는 이 꽃 같다고 할까.

그 후 핸드폰 부품공장, 자동차 부품공장, 가방공장 등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가진 기술이 없으니 주로 생산된 부품에 도장을 찍거나 포장을 하는 단순노동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 나를 향해 사람들은 탈북자는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 탈북자는 다 그래 하며 도리머리를 쳤다. 

내가 보기에도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탈북자’인 내가 싫었다. 


나는 남한사회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무기력해져갔다.


탈북자여서 적응을 못하는 걸까. 인생 누구나 겪는 과도기일까.

나는 언제면 ‘탈북자’라는 따옴표에 내성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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