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느림이 안겨준 풍경들

by 임봄

요즘은 운동화를 신고 걷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운동화를 신으니 웬만한 거리를 걷는 일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학생들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빠르게 걷기도 하고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면 책이 든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에 눈길이 머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 지점에서 비롯된 생각도 점점 많아지는 걸 느낍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와는 달리 걷다보면 신기하게도 그동안 못 보던 풍경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옵니다. 운전을 하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했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풍경들이지요. 그 풍경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습니다. 그 속에는 꽃이나 나무도 있고 알록달록한 상점 간판도 있고 바쁘게 걷거나 버스정류장에 앉아 제각기 생각에 잠겨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산수유가 샛노란 몽우리를 터뜨렸고, 하얀 목련도 진작부터 평택경찰서 앞마당을 촛불처럼 환하게 밝혔습니다. 보도블록 구석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이파리들도 봄이 온 걸 어찌 알았는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내가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하는 사이 이 작은 생명들은 제가 있을 곳에서 이리도 당당하게 맡은 역할을 해내는구나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꽃이 좋아지는 이유에 대해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젊어서는 자신이 꽃이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이 꽃이 아닌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 꽃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꽃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이지요.

나는 그 말을 들은 후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신은 언제부터 꽃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을까요.

운동화 신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차를 두고 걷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장에도 색색의 운동화 신은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는 역내에서 잠을 청하던 노숙자들은 지난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잠시 걱정했고,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오르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넘어야 할 산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언젠가 말기 암 환자 한 분이 들려주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등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창으로 비치는 햇살이나 볼을 스치는 바람, 피어있는 꽃들이 너무 찬란해서 그만 목 놓아 울어버렸다 하시더군요.

올 봄에는 운동화를 신고 걸으며 그분이 만났던 찬란한 풍경들과 오래 눈을 마주쳐볼 작정입니다.

내가 만나게 될 그 풍경 한 켠에는 따뜻한 미소를 가진 당신의 모습도 담겨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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