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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10. 2022

190. 만석꾼의 꿈을 찾아서

2박 3일 일정으로 중국 상해에 다녀왔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는 기획취재였지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이번 취재의 목적은 평택과 인연이 깊은 삼한갑족 이석영 선생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변변히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오랜만에 가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내 안의 역사의식에 작은 변화라도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더 큰 가치와 민족의 희망을 위해서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던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흘 동안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접선하던 장소였다는 부흥공원에도 가보고, 이제는 가정집으로 변했지만 육삼정 의거의 현장이 있던 자리도 가보고,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집회를 했다는 교회 모이당과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이 투척된 홍구공원, 독립운동가들의 묘가 있었다가 지금은 표식만 남아 있는 만국공묘도 가보았습니다.     

우리가 찾는 이석영 선생의 흔적은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 속에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입니다. 대체로 삼한갑족이라 하면 대대로 고위직을 배출해 낸 집안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집안이 바로 여섯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경주이씨 우당 이회영 일가 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석영 선생은 현재의 가치로 수조 원이 넘는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로 성장할 청년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도 신흥무관학교 운영으로 바닥이 나자 망명 25년 후인 1934년, 향년 80세에 상해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말년에 병세가 깊어지자 타의에 의해 잠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일제 치하에서는 잠시도 살 수 없다며 몰래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고 결국 상해에서 한인들이 살던 곳을 전전하다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중국 상해는 이러한 이석영의 말년 생활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최고의 부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하고 헌신하다가 결국 굶어서 생을 마친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이석영 선생이 말년에 살았다는 프랑스조계의 아미로는 한인들의 주거지였는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만석꾼이었던 그분이 이곳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라의 독립만을 생각하다 돌아가셨겠구나 생각하니 낯선 그곳이 조금은 나와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두 아들을 모두 자신보다 일찍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불행하게 말년을 살다 간 이석영 선생의 생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삼한갑족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친 이석영 선생의 숭고한 삶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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