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오래살다 보니 뜻하지 않게 알고 지내던 분들의 영면 소식을 듣곤 합니다. 그중에서는 친한 지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분들입니다. 인터뷰 대상 자체가 평택시민 전체이다 보니 그동안 각계각층에 있는 많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10여 년 동안 인터뷰했던 내용은 두꺼운 책 두 권으로 발행되기도 했지만 이제 그 책에 실린 분들 중에서도 우리 곁을 떠나신 분이 벌써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해 두 다리를 잃고 난 후 아내를 만나 평생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았다는 남편은 평생 자신의 다리가 되어 준 아내가 말기 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집안일은 물론이고 장애인 운전면허를 따서 아내를 태워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등 극진하게 보살피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아내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남편 분의 근황이 걱정되는 것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화 불모지였던 송탄에서 건설업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평택의 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셨던 분도 있었습니다. 그분의 호를 따서 송탄에서는 ‘마로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IMF로 인해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문화 쪽에서도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백방으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던 그분은 시간이 지나 어떤 계기로 인해 자전거를 타면서 작은 희망을 얻었습니다. 인터뷰 기사를 작게 복사해서 늘 갖고 다닌다던 그분은 불과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나 많은 사람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또 한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바로 1990년대부터 송탄지역에서 판화가로 활동하며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국제아동미술전을 처음 만든 조순조 선생님입니다. 그분도 인터뷰를 하며 처음 뵙게 되었는데 판화가임에도 전문가 못지않게 클래식에 조예가 깊어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거금이 들어가는 오페라 하나를 보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갔고 차가 끊기면 제일 싼 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며 웃던 천생 예술가 였습니다. 그분은 뜬금없이 내게 피가로의 결혼 중에서 ‘저녁바람은 부드럽게’를 들어보았느냐고 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지요.
이후 작품전시를 했는데 판매대금을 모두 국제아동미술전에 참가하는 아이들에게 크레파스를 사 줄 거라며, 자신의 작품에는 그늘이 없고 모서리도 없다는 말도 들려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늘도, 모서리도 없는 삶을 살고 싶으셨을까요. 아이들을 돕는 일에 쓰인다는 말을 듣고 그분의 작품을 작은 것으로 두 점 구입해 지금도 집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작품이 영락없이 그분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며 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참 귀하고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는 이별을 고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일까요. 오늘은 그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의 얼굴이 한 분 한 분 새롭게 떠오릅니다.
다들 안녕하시지요? 올해도 부디 모두 안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