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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65. 슬픈, 여기

한동안 이유도 모르고 많이 슬펐습니다. 슬픔은 슬픔이라 부르기 때문에 슬픈 것이라고, 가만히 응시하면 그것은 슬픔이 아닐 수도 있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나는 때때로 혼자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그 안에서 흘러 다니는 수액들이 어쩌면 눈물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저 많은 눈물들을 감추고 사느라 참 힘들겠구나 하며 어쩌면 저렇게 꼭꼭 숨기고 있을 수 있을까 감탄한 적도 많습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그건 눈물을 눈물이라 부르지 못해 그랬던 걸까요. 어떤 나라에는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어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면서요.


슬프지 않기 위해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다 슬픔과 마주쳤습니다. 주변의 무수한 생명들이 너무나 소소하게 죽어가고, 그 소소한 죽음들이 소소하게 알려지고, 그 이야기가 또 다시 소소하게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소함의 슬픔, 우주보다 크고 귀한 생명들이 소소하게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삶의 굴레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생명들의 이야기가 주변에서 시시각각 들려옵니다.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아이들이 그렇고,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지하철에서 일을 하다 어이 없이 죽어간 열아홉 청년이 그렇고, 사회적 압박에 의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스물다섯 청년의 자살이 그랬고, 그 청년의 죽음에 어이없이 함께 죽어간 서른여덟의 가장이 그렇고, 멀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찾다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수백, 수천의 난민들이 그렇습니다.


이곳이 정녕 생명을 낳고 키우는 곳인가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보람이 주어져야 한다고,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국가라는 시스템보다 하나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한낱 소녀감성으로 치부해버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아이와 함께 목격한 곡성 공무원의 아내가 자살한 청년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말을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어쩌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그 청년을 용서하겠다는 공무원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다 또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들 모두가 이 사회의 피해자들이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일지도 모르니 나는 또 그들 앞에 죄인의 마음이 됩니다.


슬픔을 슬픔이라 부르지 않으면 슬픔은 아메바 같이 너무나 많은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버린다는 걸 당신은 아시는지요. 너무 아픈 기억은 깊숙이 숨어있어서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도 잊었구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곤 합니다.


어쩌자고…, 나는 한동안 내 안에서 모습을 바꿔 자리 잡은 슬픔의 변화무쌍한 실체를 조금씩 벗겨볼 작정입니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슬픔과 조우하는 나를 부디 슬픔이라 칭하지 마시고 가만히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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