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여전히 고독한 사람들, 인간의 삶은 어쩌면 탄생부터 죽음까지 고독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홀로 있는 듯이 외롭고 쓸쓸함’입니다. 한자로도 외롭다는 뜻의 ‘孤’와 혼자라는 뜻의 ‘獨’을 씁니다. 외롭게 혼자 지내다가 죽는 것을 ‘고독사’라 부르고 문학이나 예술에서도 ‘고독’은 빠질 수 없는 단어입니다.
철학자들도 오래 전부터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고독’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고독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정의하며 고독은 자기 자신에게서 연유한다고 설명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육체적 활동을 멈추고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고독이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의 고독은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고독인 셈입니다.
블랑쇼는 작가가 몰입할 수 있는 자양분이 ‘고독’이라고 말합니다. 작품을 생산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고독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지만 결국 자신이 생산해내는 작품에 의해서도 표현될 수 없음을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독’이라고 말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가 갖는 필연적인 고독도 있습니다. 때문에 언어를 기반으로 생활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독에 주목하고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은 고독이 결코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뜻의 고독은 어쩌면 고독의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합니다. 그러나 그 고독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뿌리를 찾다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독을 잘 견디는 방법도 알게 될지 모릅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탯줄이 엄마와 나를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며 고독이 없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그때부터 혼자가 됩니다. 천형처럼, 운명처럼 고독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탯줄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는 평온함, 우리는 그런 세상 속에서 언제나 고독과 함께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탯줄로 연결됐다고 생각할 만큼 누군가와 긴밀히 연결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고독의 깊이가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요. 고독은 우리와 뗄 수 없는 것이겠지만 당신과 내가 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고독을 감내하며 견뎌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