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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72. 만남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정현종 시인은 노래합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역사, 아니 그 윗대의 윗대가 살아온 역사도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사람과의 만남이 정말 어마어마한 순간이라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느껴야 했던 수많은 좌절과, 고독과, 인내와, 아픔과,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이 들어 생기는 얼굴과 몸의 주름들은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두었던 그 많은 감정의 길들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짓 없는 자연과 같아져야 하기에 더 이상 안에 가둬두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당신과 내가 만나는 순간은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나의 과거·현재·미래가 당신의 과거·현재·미래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통해서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우주의 빅뱅에 맞먹는 엄청난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짧은 순간 눈웃음으로 마주친다고 해도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찰나요, 또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당신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나는 당신의 견고한 얼굴 뒤에 감춰진 상처입고 부서진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당신의 늑골 저 깊은 곳에 숨어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봅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동안 부끄러워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겁먹은 눈동자가 보입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당신의 깊고 어두운 곳에 웅크린 작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괜찮아…, 괜찮아…, 울고 싶으면 내게 기대서 마음껏 울어도 돼…’ 하면서 말입니다. 


새벽비가 내리자 가로수 잎들이 흔들립니다. 비와 나무의 만남은 그렇게 조용히 이뤄집니다. 저항하는 일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나누는 이야기는 대지를 촉촉하게 적십니다.


어제는 저녁 무렵 노을이 지는 벤치에 앉아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몽골의 고비사막을 휘돌아 내게 온 바람은 그곳에서 죽어간 낙타의 쓸쓸한 검은 눈동자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내 이야기도 지구 반대편을 돌아 바람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겠지요. 발밑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에게까지 고르게 전해지는 바람의 너그러움에 나는 마음이 겸허해집니다.


비도, 바람도, 눈도, 태양도 자연과 만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의 커다란 존재를 느끼며 받아들입니다. 싫다고 거부하지도, 나보다 힘이 세다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스며들 뿐입니다.


우리의 만남도 그렇게 조용할 수 있다면…, 마음이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 수만 있다면…,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당신에게 찾아가 가만히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의 만남이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찬란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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