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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82. 세상을 보는 눈

가을은 나무가 또다시 꽃을 피우는 계절이라고 합니다. 이제 얼마 후면 꽃처럼 피어난 빨갛고 노란 잎들도 찬바람을 따라 떠날 채비를 하고 우리는 겨울의 초입에서 짧게 머물다 간 가을을 되새김질 하게 되겠지요. 해마다 맞는 가을은 고독과 쓸쓸함의 계절, 긴 코트 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왠지 아름답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10여 년 전 가을, 스승이신 고령의 동화작가 선생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커다란 은행나무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그 나무에는 가지마다 다닥다닥 열매를 매달려 있었지요. 어찌나 은행이 많이 달려 있었던지 함께 있던 우리 제자들은 “나무가 크니 당연히 열매도 많은 거지” “이 열매를 다 따면 몇 년은 먹겠다” 등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말없이 한참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시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많은 새끼들을 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느냐” 하시며 정성껏 나무를 어루만져 주시더군요.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 열매 하나도 단순히 인간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을 품은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수원 화성행궁에서 열린 국화축제를 보러 갔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국화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국화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만든 커다란 작품은 ‘현애’라고 하더군요. 수백송이의 작은 국화꽃들로 하나의 작품을 만든 것이었는데 크기만큼이나 빽빽하게 핀 국화꽃들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감상하다 우연히 화분 속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꽃들이 하나의 줄기에서 나온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이 많은 꽃들을 피우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가 많은 자식을 품어내는 장면을 본 것처럼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꽃들을 아름답게 피워내기 위해 국화 뿌리와 줄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을까요. 그리고 그 꽃들을 잘 키우기 위해 농부는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은행나무를 어루만지며 제자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시던 스승님이 생각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스승님이지만 자주 잊고 지내는 스승님의 오래 전 가르침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평가하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에 비해 세상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더 깊은 것일까요.


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순간도 내게 더 많은 것을 보아달라고 요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더 많은 면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많은 면을 보려는 나의 노력에 달려 있고 그것은 오직 단 하나, 가장 바꾸기 힘든 내 생각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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