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스미다 1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봄 Feb 09. 2022

87. 스미다

누군가가 내게 좋아하는 동사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스미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스미다’는 보이지 않게 서서히 젖어들어 이윽고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스민다는 것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를 가졌지만 결국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어떤 것보다도 큰 화합을 이루어 냅니다.


먹물은 화선지에 스며들어 농담濃淡과 운치를 만들어 냅니다. 스미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조급함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의 존재가 스며들 수 있도록 서로를 인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먹물과 화선지는 서로를 음미하듯 천천히 스밉니다. 때론 진하게 때론 옅게 그들은 어우러져 하나가 되고 이윽고 작품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으로 다시 스며듭니다. 한번 스민 것은 다시 스며들 때 더 강한 힘을 갖습니다. 그것이 스며든 것의 힘입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배어나옵니다. 큰 소리로 웃는 것이 아닌 누가 알새라 혼자 조용히 짓는 미소, 그것은 스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미소입니다.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나가 되어 멀리 떨어진 연인을 동시에 웃게 하는 것, 그것은 이미 사랑이 그들의 영혼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미소는 아마도 훗날 그들의 아기에게로 전해지겠지요.


봄날, 얇은 창호지로 빛이 스며듭니다. 창호지에 스민 빛은 그곳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충분하게 스며든 빛은 대상을 통과해 배어나오고 배어나온 빛은 창호지의 성질과 융화되면서 더 온화한 빛으로 탄생합니다. 그 빛은 처음의 빛과 달리 너무 눈부시거나 뜨겁지 않아 눈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나와 타자의 성질을 잘 어우리지게 만들어 온화하게 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며듦의 힘입니다.


어둠은 세계 속으로 스미고 우리는 어둠 속으로 스며듭니다. 모든 것을 침묵 속으로 스미게 만드는 어둠이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번잡했을까요. 매일 저녁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삭막한 시간들을 견뎌야 했을까요. 가만히 스며들어 일상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쉴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매일 어둠에 스며드는 것은 오늘을 살게 하는 필수조건이며 내일을 활기차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물이 스며들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스민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서로를 긍정하고 자라게 합니다. 강한 긍정도 강한 부정도 아닌, 그저 서로를 인정하고 손 내밀어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함께 더 성숙해지는 것, 스미는 순간은 환한 떨림의 순간입니다.


스며든 빛에 모든 것을 내 맡긴 사진처럼, 우리도 그렇게 스며들어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물이 모래 틈으로 스며들듯,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진 애국가가 시민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듯, 웅크린 내게 ‘걱정 말아요’ 하는 당신의 위로가 스미듯, 오늘 받은 한줄 메시지가 내 마음에 스미듯, 우리의 따뜻한 눈길과 마음도 오늘 서로에게 가만히 스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전 17화 97. 말의 품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