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기차를 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인터넷으로 편하게 기차표를 끊으니 굳이 역에서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살 일도 없습니다. 좌석까지 마음대로 지정할 수도 있으니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해 조금만 기다리면 미리 예약한 지정좌석에 앉아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만일 각 칸 맨 앞자리를 예약한다면 휴대폰 배터리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어 그야말로 일석이조입니다.
기차에 타면 언제나 밀린 책읽기에 바쁩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살지만 그래도 시간은 왜 항상 인색하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쁜 시간에 쫓겨 기차에서 책을 읽을 요량으로 시간을 배정했던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서 계시는 어르신을 보는 순간 읽던 책을 주섬주섬 싸들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70년대에 태어난 우리가 자랄 때는 언제나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요. 자리를 양보하면 어르신은 당연히 책가방이나 짐을 받아 당신의 무릎에 올려놓았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고운 눈웃음이 함께 전해지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따뜻한 풍경이지요.
만일 어르신이 서 계시는데도 모르는 척 앉아있다가는 주변사람들이 보내는 따가운 눈총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대로 앉아있기란 참으로 견디기 민망한 일이었지요. 간혹 끝까지 자는 척하며 앉아있는 친구에게는 어김없이 주변 사람들이 ‘싹수가 노랗다’며 들으라는 듯이 한소리씩을 하거나 어떤 사람들은 대놓고 야단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조금 힘이 들더라도 어르신들께 자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히 가는 것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따뜻한 풍경이 이제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예약한 지정좌석에 어르신이 앉아있다 해도 당당하게 ‘내 자리’라며 일어날 것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기 때문입니다. 내 바로 옆에 서서 가는 어른들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 젊은이들에게는 내가 예약한 그 좌석은 당연히 ‘내 것’이고 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대학교 1~2학년으로 보이는 어린 여학생이 할아버지에게 “제 자리예요”라며 당당하게 일어설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들고는 더 이상 주변을 살피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즘 기차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어르신에게 양보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내 자리라는 논리를 반박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따뜻함을 전하던 양보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오늘은 내 좌석 앞에 친정어머니 또래의 어르신이 서 계십니다. 난 어린 시절 배운대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합니다. 덕분에 책을 읽을 기회는 잃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미소와 따뜻함을 덤으로 받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원합니다. 무릎 수술을 해서 다리가 아픈 우리 엄마가 버스나 기차를 탔을 때 내가 양보했던 횟수만큼 누군가도 우리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