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INFP 르포 작가의 성장기

회피형 INFP가 각성하면 벌어지는 일 10화 |

by 산들바람
당신의 이야기도 언젠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이 글이 작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퇴직금을 털어 산 265만 원짜리 노트북이 세 번째 고장 났다. 2025년 1월 10일,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글의 마지막을 검토하던 순간, 액정 화면이 갑자기 꺼졌다. AS센터로 가니 메인보드 교체 판정이 났다. 하드디스크를 초기화해야 할 수도 있다 했다. 작가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전자기기 이상이다. 또다시 고장 난다면, 그래서 교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일증상 3회가 아니라서 교환이나 환불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구매한 지 1년도 안 된 노트북이 세 번이나 고장 났는데, 소비자의 권리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늘 갈등을 피해왔다. 회피형 INFP라는 성격 탓이었을까? MBTI 성격 유형 중 INFP는 이상주의적이면서도 갈등을 싫어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거기다 회피형 애착 유형이기까지 하니... 그동안 나는 그저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는 핑계로 회피를 선택해 왔는데 대기업과의 싸움이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더는 회피형으로 살지 않겠다 다짐하지 않았나. 그래서 도망치는 대신 모든 과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첫 문장을 쓰면서 이 글이 어디로 향할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억울한 마음을 글로서 정화하며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르포는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문학 작품 속에서 개인과 거대 조직의 대립은 오래된 주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은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된 한 남자가 거대한 관료제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요제프 K는 자신이 왜 기소되었는지도 모른 채 법원과 변호사, 관리들을 만나며 끝없는 절차의 늪에 빠져든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깊은 공감을 느꼈다. AS센터, 고객센터, 구매문의 대표전화, 1372소비자상담센터, 대한법률구조공단, 지방법원을 오가며 '동일증상'이니 '동일하자'니 하는 모호한 기준 속에서 헤매는 내 모습이 그와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나날들』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오웰은 파리의 식당 주방과 런던의 거리에서 직접 체험한 하층민의 삶을 기록했다. 그는 관찰자이자 참여자로서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나도 그처럼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공식 홈페이지-커뮤니티-의 다른 소비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AS센터의 방문 상담 내용, 고객센터와의 통화 내용, 공식홈페이지 1:1 문의, 구매문의 대표전화의 답변까지.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분노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김정선의 『덕호와 성태』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그는 구조적 폭력의 현장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향한 인간적 이해를 놓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나도 점차 깨달았다. AS센터의 직원들, 고객센터의 상담사들, 그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르포를 쓰면서 점점 변화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카프카의 주인공처럼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좌절했다. 하지만 오웰의 작품에서 배운 것처럼 꼼꼼한 기록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동일증상 3회'에서 '동일하자 3회'로 바뀌는 기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과 상충하는 내부 기준, 각기 다른 답변들. 기록은 이러한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나는 책임 있는 사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들의 사례와 XXXX(주)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경험했던 최고의 서비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XXXX(주)의 모든 고객 접점에서도 이런 프리미엄 서비스가 구현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억울함이었다. 억울하면 왜 눈물이 나는지. 그 눈물은 분노를 낳았고, 분노는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 행동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감정을 정제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글쓰기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회피형 INFP로 살아오면서 나는 늘 갈등을 피해왔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의 무기력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깨달았다. 진정한 평화는 회피가 아닌 직면에서 온다는 것을. 문제를 마주하고, 기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이라는 것을.


당신도 언젠가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억울함에 눈물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그때 부디 도망치지 말기를. 그리고 펜을 들기를. 처음에는 서툴고 감정적일 수 있다. 그래도 좋다. 글쓰기는 당신의 감정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 이야기-회피형 INFP가 각성하면 벌어지는 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글쓰기가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이게 할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움직임은, 아마도 더 나은 곳을 향한 것일 거라는 점을. 당신의 이야기도 언젠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이 글이 작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 삽입된 이미지는 MicrosoftDesigner 생성했습니다.

* 'Syan'이 이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추상화로 표현했습니다.

* 이미지 생성 프롬프트는 '푸른 눈물방울이 검은 잉크로 변하는 추상 미니멀리즘 그림, 선(禪)적인 붓놀림, 흰색 배경, 흐르는 움직임, 감정 표현, 높은 대비, 전문적인 박물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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