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더이상 아닌 것 같지만 좋은 기억때문에 머뭇거리게 된다
공동체 내부에 균열이 심해져 더 이상 공동체라 부르기 어려운 지점이 왔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 공동체인 '우리동네사람들(이하 우동사)'은 일본의 애즈원(As One) 커뮤니티와 교류하며 활력을 얻는 듯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기존의 힘을 앗아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정서적 이탈: 애즈원 코스를 다녀온 이들은 "좋았다"는 말을 남기고 얼마 못 가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한국에 돌아온 이들조차 매일 일본의 스승들과 통화하며 속내를 나눴다.
생기 잃은 현장: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일본에 가 있다 보니, 정작 우리가 일군 셰어하우스와 펍(Pub)에는 생기가 사라졌다. 갈등이 생기면 현장에서 풀기보다 다시 일본의 이론과 코스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리더는 일찍이 이 문제를 직시했던 것 같다. 끝났을 때 말한 "애즈원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다"는 소회는 뼈아픈 진실이었다.
노동 감각의 차이: 일본 애즈원 사람들은 수십 년간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견뎌온 이들이다. 그들은 새벽 2시 호출에도 기꺼이 응하는 단단한 노동 감각이 있었다. 그 단단함이 있기에 '쉬고 싶을 때 쉴 자유'를 말해도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기초가 없는 권리 주장: 반면 우리는 그만한 밑바탕 없이 "내 마음을 소중히 하고 싶어", "하기 싫은 건 안 할래"라며 무책임하게 펍과 카페의 문을 열고 닫았다.
자립의 실패: 자본주의 사회의 최소한의 규칙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함에 빠졌다. 몇 년간 지원 사업으로 연명했지만, 스스로 일어서는 법(자립)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공동체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장벽: 애즈원 코스를 깊이 이수한 '심화 그룹'과 그렇지 못한 '소외 그룹'이 나뉘었다.
기준 없는 구분: 누가 정했는지 모를 '애즈원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경계가 생겼다. 코스를 아무리 들어도 벽에 부딪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금세 스태프로 발탁되는 사람이 생기며 위화감은 커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떠나지 못했다. 일반 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끈끈함과 마음 나눔의 기억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난 이제 공동체 안 할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복잡한 속내를, 그때의 나는 살필 줄 몰랐다.
나 역시 버거움을 느꼈지만, '힘이 모이면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계속 일을 벌였다.
어설픈 적용: 애즈원 이론을 어설프게 배운 채 사업을 벌였다가 힘이 빠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애매한 포지션: 책임지는 리더도, 그렇다고 순수하게 따르는 팔로워도 아닌 채로 몇 년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보냈다.나의 이기심도 애즈원 이론을 만나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으로 발전해있었다. 하기 싫은 것은 나도 안했다.
나는 핵심 이념(뿌리)은 바꾸지 않은 채 겉모습(가지)만 바꾸면 가능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근본이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나만 가장 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