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작가 지망생입니다 #5
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에는 작가가 대학원을 다니며 글을 썼던 에피소드가 나온다. 대학원 연구실에 다니던 무렵, 그는 일요일 오전마다 알람을 미루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일어나 일찍 문을 여는 카페에서 글을 썼다고 했다. 카페를 향해 걷는 길, 아직 공기는 서늘하고 캠퍼스는 고요했다고. 바쁜 대학원 시절 본인이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고행을 해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는 상상한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에서 덜 깬 무거운 몸으로 쌀쌀한 캠퍼스를 가로질러 도착한 카페는 따뜻했으리라. 그곳에서 김초엽 작가는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안정감 있는 자리를 잡고 음료를 시키고 노트북을 열어 글을 썼을 것이다. 피곤함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작게 한숨을 쉰 적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고 나면 흡족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기억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바쁜 일상에 허용된 유일한 틈 사이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내려던 이들의 공통된 기억. 이 대목을 읽으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 카페 구석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비벼 잠을 쫓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그건 나 또한 직장인으로서 시간과 체력의 한계와 싸우며 애써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 직장을 그만두며 과거의 한계를 청산하고 산뜻하게 시작한 생활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나이든 나라던지, 나이든 고양이라든지. 그것이 무엇이든 돌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잠을 적게 자도 대충 아무거나 먹어도 어떻게든 버텨내던 몸이 이제는 아주 잠깐의 과로에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심장이 엇박으로 뛰는 부정맥 증상이 심해지고 피검사 결과에도 하나둘씩 이상이 나타나 식단과 운동에 공을 들여야 한다. 물과 사료만 챙겨줘도 건강했던 고양이들도 나이가 들어 아프다. 하다못해 집까지 나이가 들었다. 오래된 집과 낡은 가구가 번갈아가며 고장 나 손을 보느라 심심하지 않다. 예전에는 미처 신경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삶의 모든 영역을 골고루 돌보며 생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여야 한다.
예전이라면 끼니를 대충 때우고 집안일도 하는 둥 마는 둥 책상에 앉아 어떻게든 하기로 한 일을 마쳤을 텐데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자립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작업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빼먹을 수 없는 일정이 있다. 살기 위해 하는 운동, 여러 가지 야채를 다듬어 만드는 저녁용 샐러드, 식사는 삼십 분에 걸쳐 천천히 먹어야 하고 아빠에게 전화로 안부를 꼭 묻고 싶고, 설거지에 청소를 마치고 온라인으로 식재료 장을 보고 나니 저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부랴부랴 한 시간 정도 글을 썼을까, 야근을 마친 남편이 집에 돌아온다. 단감을 깎고 따뜻한 차를 만들어 직장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 그를 위로하는 일을 잊지않는다. 오늘 꼭 끝내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벌써 늦은 밤이 되어버렸다. 심장이 멋대로 날뛰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일을 하며 가족까지 돌보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게 시간적인 여유가 넘친다는 것을 잘 안다. 좀더 부지런하게 시간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도. 하지만 일상의 면면을 돌보는 일이 필수가 되고 그 비중이 커지면서 자립작가 지망생이라는 정체성이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초조함이 드는 날이 있다. 젊은 날의 어느 날처럼 먹고 씻고 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전부를 자립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에 헌신할 수 없음이 아쉽다.
‘돌봄’과 ‘작업’은 서로 상충하거나 무관한 말 같지만, 둘 다 우리 삶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들이고 둘 다 창조성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창조성의 이미지는 비범한 천재가 홀로 오랜 시간 몰입하고 집중해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창조적인 작업은 정지되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흘러가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돌봄과 작업> (돌고래, 2022)
홀로 오랜 시간 작업에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자립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하던 내게 이 얼마나 안도가 되는 문구인지. <돌봄과 작업>의 공저자는 모두 엄마이자 창작자이지만 책은 너그럽게 엄마가 아니어도 돌봄을 실행하며 어쩔 수 없이 전과는 다른 일상의 한계를 갖게 된 나 같은 사람까지 끌어안는다. 창조적인 작업은 흘러가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직장인으로서 가졌던 한계와 짐이 오히려 창조성과 의지를 부채질하는 동력이 됐다는 걸, 창작의 중요한 주제가 됐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렇다면 현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상의 한계라고 여기는 것들은 곧 생활 그 자체가 된다. 한계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창작자에게 한계는 곧 이야기이자 가능성이다. 자립작가 지망생이자 최선을 다해 일상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항상 배에 힘을 주고 있는 생활균형인 사이에서 전과는 다른 나만의 창조적인 작업이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썼던 다이어리에는 시간이 없다는 절망과 어떻게든 해낼 거라는 희망이 팽팽했다. 절망과 희망 그 어디쯤 적혀있던 말. “내 짐은 내 날개다.” 지금은 절판된 노은임 화가의 그림에세이 제목이다. 어디선가 이 문구를 본 나는 다이어리에 그 말을 옮겨적으며 나를 내리누르는 것들을 버텨낼 힘을 달라고 간절했을 것이다. 그 무거운 것들로 인해 이미 날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전히 자꾸 잊는다. 우리의 짐을, 한계를 달고 우리는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