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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n 12. 2024

취향과 호사

여름을 맞아 아웃렛에서 하나에 이 만원 정도 하는 반팔티를 두 벌 샀다. 옷이 마음에 딱 들지는 않았지만 취향보다는 가격을 감안했기에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올여름을 위한 옷쇼핑은 이게 끝이다. 나의 옷장은 간소하다. 작년에 입던 것 중 상태가 괜찮은 티 두 벌에 새로 산 티 두벌이면 여름을 충분히 날 수 있다. 신발도 일 년에 한 두 켤레 정도만 산다. 화장품도 피부에 순하면 그만이다. 동네 백반집에서의 외식을 감사히 즐긴다. 운동은 홈트를 하거나 동네를 걷고 강습료가 저렴한 시립수영장을 다닌다. 예전과 비교해 소비의 규모가 많이 줄었다. 자발적으로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월급생활과 이별을 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돈을 아껴야 했다.


백화점에서 사던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바디용품과 화장품이, 철마다 별생각 없이 사던 옷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발이, 단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사들이던 문구가 점차 기호품으로 분류됐다. 호기심이 생기면 수강료 걱정할 일 없이 새로운 강좌를 찾아 듣던 배움의 날들에도 제동이 걸렸다. 핸드폰을 바꾸는 일이 힘들어지고 주말마다 맛집이나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는 일도 특별한 행사가 됐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나를 구원해 주던 작은 호사와 취향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즐기던 소비와 안녕을 고했다.




돈을 내고 누리던 즐거움을 하나씩 포기할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얻은 시간과 자유를 생각하며 기꺼이 그것들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은 취향이 몇 가지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욕실에서는 어떤 글자도 수 놓이지 않은 무지의 수건만 사용할 것.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한 수건은 전부 알록달록하고 누군가의 기념일과 단체명이 인쇄된 것들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독립을 하며 수건이란 물건도 돈을 주면 원하는 색감과 재질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두근거림이란. 그 이후로 나는 그 어떤 것도 새겨지지 않은 차분한 색의 도톰한, 내 마음에 쏙 드는 수건만 쓰리라 결심했다. 그 결심을 위배한 건 하나밖에 없는 조카의 돌기념 수건을 받았을 때 정도뿐이었다.


애써 지켜내던 화장실에 다시 단체기념품과 답례품 수건을 들이던 날, 이제는 취향이라는 것을 지켜낼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슬펐다. 취향을 유지하며 작은 호사를 누리는 일에는 돈이 드는데 그전만큼 돈을 벌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체념이 빠른 나는 금방 매일 다른 색의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했다. 이제 나는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야 하나.





얼마 전 자연 속의 카페에 다녀왔다. 뒤로는 숲이 펼쳐지고 앞으로는 매실나무와 쥐똥나무가 심어진 정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매실나무에는 털이 보송보송한 매실열매가 달리고 쥐똥나무에는 하얗고 작은 꽃들이 만개해 근방의 벌이란 벌들이 몽땅 모여들었다. 숲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맑고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무와 벌과 새들에 둘러싸여 달달한 대추라떼를 마시면서 일기를 썼다. 바람이 불면 쥐똥나무 꽃향기가 기분 좋게 얼굴을 스쳤다. 일기를 다 쓴 후에는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호박벌과 어리 호박벌이 붕붕거리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나뭇가지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구경했다. 음료 한 잔값으로 이런 시간을 누리다니 호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카페의 다음 코스는 바로 옆 호랑나비의 종령 애벌레가 서식하고 있다는 숲이었다. 식물 공부를 하러 다녀온 어느 날, 모임의 한분이 산초나무에서 호랑나비의 종령 애벌레를 봤는데 내가 멀리 있어 알려주지 못했다며 애벌레의 위치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포켓몬스터 캐터피의 모델인 이 귀여운 애벌레를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일부러 그 장소를 다시 찾았다. 핸드폰에 담긴 보물지도 덕분에 금방 산초나무를 찾은 남편과 나는 함께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를 샅샅이 살폈다. 새똥처럼 생긴 어린 애벌레가 금방 눈에 띄어 희망에 부풀었지만 한참을 더 찾아도 종령 애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모두 다 호랑나비가 되어버린 것일까.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친절한 문화해설사 한분이 본인도 여기서 호랑나비의 종령 애벌레를 봤다며 같이 애벌레 탐색에 나섰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으로 드디어 크고 통통하고 연둣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애벌레를 만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애벌레는 너무나도 나의 취향이었다.




애벌레를 둘러싼 짧은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살까 걱정했던 사람치고는 너무 재밌게 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는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자연이 나의 새로운 취향이자 자연을 거닐며 살아있는 것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나의 새로운 호사가 되었다고. 그때도 즐거웠지만 지금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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