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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y 30. 2024

조금 외롭게

세탁소와 수선집에 맡길 옷을 가득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화단에는 연분홍 작약이 활짝 피고 풀과 꽃향기가 섞여 달콤한 공기는 차지도 덥지도 않아 들이쉴 때마다 기분이 좋다. 해가 막 넘어가 하늘이 불그스름한데 놀이터는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하다. “너네 한참 놀았잖아. 이제 집에 가자” 엄마의 말에도 아이들은 바위 위에 풀이 담긴 작은 그릇을 올려놓으며 소꿉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오래된 아파트 상가 1층 돈가스를 파는 좁은 가게에는 사장님과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할머니가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이제 곧 어둠이 오겠지만 낮의 활기가 아직 남아있는 거리에 사람들은 서로 함께였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의 저녁에는 누군가와 만나 동네를 걸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동네에 불러낼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문득 조금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오늘 화면 너머의 사람들과 작업인증을 하며 말없이 그림을 그렸고 치과에 가서는 이가 시린 순간을 참지 못해 몇 번인가 신음소리를 냈다. 카페에서 혼자 글을 쓰고 집에 돌아와 혼자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혼자일 것이다. 조용한 고양이들과 함께. 직장을 그만둔 후 평일의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있다. 같이 사는 배우자가 있고 부모님과 친구와 동료들이 있지만 내 생활의 기본은 혼자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원했던 일이었다.


공기 하나에 꽉꽉 눌러 담긴 밥알의 기분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멥쌀도 아닌 찹쌀, 게다가 된밥도 아닌 진밥. 온종일 숨 쉴 공간조차 없이 다른 밥알들과 한 덩어리로 뭉쳐있으면 끈적거리는 몸으로 혼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직장을 그만두니 집은 편하고 혼자는 가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홀로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가족과 친구들, 주기적으로 열리는 사적인 모임들, 취미와 공부 모임까지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을 마주하면 마음을 다해 바라보고 듣고 말하고 웃고 끄덕인다. 활기를 얻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재밌어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힘을 다해 머리를 맞대고 떠들고 박수를 친 후 흥분이 남아있는 채로 집에 돌아오면 고요 속에서 안도한다.




사무치게 외로웠던 시기도 있었다. 공깃밥의 밥알로 사는 것이 싫다면 오래도록 혼자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해야 할 일도 있어 집에서 몇 개월간 은둔했다. 그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몰랐다. 고립의 끝, 카페 안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그 사이에 끼고 싶은 열망을 느끼고 알았다. 아, 이것도 아니구나. 단절되기는 원치 않지만 항상 누군가와 부대끼는 것도 싫다. 소란하기를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침묵 속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너무 부산하면 내가 되지 못하고 너무 외로우면 한없이 가라앉는다. 함께와 혼자 그 사이를 충분히 오가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적당한 거리를 찾았다. 책 <명랑한 은둔자>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유가 있는 상태”였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을 때는 모임이 한데 몰리지 않도록, 모임과 모임 사이에 꼭 혼자 보내는 날이 있도록 신경 쓴다. 사람들을 만나면 최선을 다해 그들과 함께 한다. 혼자가 되면 그들과의 만남을 복기하며 다정한 눈맞춤, 웃음과 대화가 내 영혼에 제대로 흡수되는 시간을 갖는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야 다음에 또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다. 은둔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번 겨울에는 여러 가지로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데 우리 봄이 오면 만나는 게 어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는 극단으로 외로워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다. 집에서 빠져나와 산책을 하고 동네를 걷고 카페에 가며 사람들과 함께 풍경이 된다.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 집에만 틀어박혀야 할 때는 게임이라도 한다. 현실의 작은 집에는 고양이와 남편뿐이지만 심즈에서 나는 큰집을 짓고 아이를 많이 낳는다. 가족들과 큰 식탁에서 북적거리며 식사를 하고 어디든 함께 움직인다.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가시는 기분이 든다.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드는 날, 나는 함께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럴 때면 정이 넘치는 대가족, 동료애가 돈독한 회사, 다정한 친구들과 한 반에서 생활하는 학교처럼 어디든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젓는다. 역시 나는 조금 외롭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내가 있을 적당한 장소에 있다. 사무치게 외롭지도 시끌벅적 신나지도 않은 여기. 조금 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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