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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y 23. 2024

바닷가 마을 작은 집의 우리에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걸 너도 헤아리고 있을까? 때때로 나는 영국 남서쪽 바닷가 마을에 있던 작은 집으로 떠올려. 버트와 재키의 집이었지만 몇 달 동안 그곳은 분명 우리의 집이기도 했어. 큰 개들이 뛰어노는 잔디 공원에서 출발해 다소 특색 없고 삭막한 단층집들을 지나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모서리의 큰 집이 나오지. 그런 다음 좁은 골목의 삼거리를 걸어야 해. 그곳은 항상 공중전화부스의 유리가 깨져있고 가뜩이나 좁은 보도 위에 후드티를 머리까지 덮은 불량청소년들이 자주 앉아있어서 나는 여길 지날 때마다 긴장을 해야만 했어. 아무 일 없이 삼거리를 지나 안도의 한숨이 나올 무렵 드디어 만나게 되는 우리의 노란 2층집.


재키가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에서는 오븐에서 익어가는 이국의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고 버트는 다이닝룸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어. 그는 어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우리에게 투박한 버밍햄 사투리로 오늘 학교는 어땠는지를 물어. 나이 든 잉글리시 코커 스파니엘 퍼지는 우리를 봐도 본체만체하고 (우리가 객식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똑똑한 녀석이었지) 키가 크고 머리가 까만 사람을 무서워하는 보니는 너를 피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어. 우리는 매일 버트가 차려주는 토스트와 시리얼로 함께 아침을 먹었고 함께 학교로 걸어갔어. 학교가 끝나면 함께 테스코에 들려 장을 보고 함께 집에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었지. 가끔은 일어로 대부분은 영어로 띄엄띄엄 대화를 나눴어. 주말이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근처 마을로 놀러 가 오래된 티룸에서 홍차와 스콘을 먹었어.




우리가 함께했던 광경은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내 마음속에서 점점 선명해져. 가끔은 현재의 삶이 무거워 간절하게 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어. 어디든 나무와 풀과 꽃이 만발했던, 언제든 바닷가를 거닐 수 있던, 동네의 외곽을 벗어나면 영화에서나 보던 푸른 언덕에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는 그곳으로. 하지만 결국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을 날아간 후 버스로 4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 멀고 먼 그곳에도 삶과 죽음이 있고 그 사이 마주해야만 하는 크고 작은 난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해.





우리는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로 놀리거나 심지어 욕을 하고 돌을 던지는 영국의 무서운 청소년들을 마주해야 했어. 어디를 가든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지. 어학연수 기간이 끝나 각자의 나라를 돌아가면 뭘 해야 할지 미래를 걱정해야 했고 한 번씩 심하게 오는 향수병에 무기력하기도 했어. 건축설비 관련 일을 하고 은퇴했던 버트는 관절염으로 걸음이 부자연스러웠고 재키는 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어.


어느 날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오븐에서 구워지는 파이 향기 대신 집이 텅 비었음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지. 전화가 울렸어. 재키의 엄마 이블린이었어. 안타깝게 나는 그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어. 내가 이해한 건 몇 단어뿐이었어. 평소에도 자주 집에 찾아오던 재키의 아들, 그리고 그의 죽음. 콜린은 수줍고 다정한 사람이어서 우리는 그를 좋아했어. 갑작스러운 콜린의 죽음이 슬펐지만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제대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고 함께 숨죽이고 이 집에 내린 어두운 날들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지.




작년쯤인가 나는 오랜만에 우리가 다니던 학교와 집을 검색했어. 코로나 때 영국의 많은 어학원이 문을 닫았다고 해. 무려 50년이나 한 가족에 의해 경영되던 학교도 문을 닫았어. 학교의 폐업은 큰 사건이라 지역신문에 보도됐어. 우리의 작고 노란 2층집 역시 누군가에게 팔렸어. 이제 그곳에 버트와 재키는 없어. 그 집은 지금 공사 중이라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닐거야. 너의 이메일 주소는 오래전부터 유효하지 않았지. 모든 것이 시절인연이기에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그게 전부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는 우리의 약속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언제고 정원이 예뻤던 그 집으로 내달려. 문을 열면 그곳에는 언제나 버트와 잭키, 퍼지와 보니, 그리고 네가 있어.


-토모미에게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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