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변했을까
변신은 늘 흥미롭다. 우리는 언제 변신을 할까?
변신이 필요할 때는 언제이고, 왜 우리는 애써서 변신하려 할까.
하지만 가끔은, 그 변신이 진짜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겉모습만 바뀐 건지, 아니면 마음까지 달라진 건지.
고대 신화 속 아프로디테는 여우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시켰다.
겉보기엔 기적 같았지만, 그건 선물이 아닌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 끝에 드러난 건 여우의 본성이 아니라,
시험을 만든 자의 본모습이었다.
사람은 언제 진짜 모습을 드러낼까? 기분이 나쁠 때? 아니면 슬플 때?
하지만 나는, 권력을 가졌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여우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바꿔준다.
듣기엔 따뜻한 이야기 같지만, 그녀의 목적은 달랐다. 진심으로 도와주기보다는,
그 여우가 정말 변했는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일부러 여우의 본능을 자극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여우는 쥐를 보고 달려들었고, 아프로디테는 이렇게 말한다.
“봐, 본성은 안 변해.”
그 장면에서 나는 문득 생각하게 됐다.
진짜 본성을 드러낸 건 여우였을까, 아프로디테였을까?
여우는 원래 그런 동물이다. 본능대로 반응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그걸 알면서도 유도했고, 결과는 오롯이 여우의 탓으로 돌렸다.
정작 상황을 만든 건 그녀 자신이었는데도.
이 이야기를 보며 떠오른 말이 있다.
링컨은 말했다. “사람의 진짜 성품을 알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쥐여보라.”
사람은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기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누군가는 그 힘으로 남을 돕고, 누군가는 그 힘으로 남을 시험한다.
이건 신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비슷한 장면들을 마주친다.
어떤 의사가 수술을 잘해놓고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 자랑한다.
결과가 좋으면 자기 덕, 나쁘면 환자 탓, 체질 탓, 관리 탓이 된다.
책임은 지지 않고, 피해는 약자가 떠안는다. 아프로디테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넘기고 싶지 않다.
이런 구조를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 순간,
우리 모두가 또 다른 아프로디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권력은 남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프로디테는 여우를 시험했지만, 그 시험 끝에 드러난 건 여우의 본성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본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