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 또는 언니)! 언제오셔? 보고싶은디~~이제 추수 다 끝나서 성 오면 군불 땐 방에서 뜨개질도 하고 홍시도 먹으려고 단지에 땡감도 가득 쟁여 뒀는디."
전화를 받은 엄마는 안절부절 날 새길 기다렸다 조치원을 가기 위해 첫 기차를 타셨다. 총기가 뛰어나고 길눈은 내비게이션 수준이라 팔십이 넘은 연세에도 어디든 다 찾아다니시는 울 엄니. 자식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며, 코로나 정국에도 방 안에서 한 시간 이상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 걸으시고, 팔을 아래위로 돌리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근력도 키우신다.
앞집 할머니가 건강이 안 좋다며 반찬을 만들어 나르기도 하시는데 엄마보다 열 살이나 아래다.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내과, 통증크리닉도 당신이 알아서 찾아다니고 어지간히 다급한 일이 아니면 자식들걱정한다며 함구하신다. 보약이나 영양제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데 '와드득' 얼음도 깨물어 드시고, 혈압 심전도 모두 정상인데 갑자기 어두워진 청력 때문에 보청기를 끼시는 게 조금 불편할 뿐이다. 하루 이틀만 앓다 갑자기 데려가라고 매일 기도하시는데,요즘은 줌으로 예배 보는 것도 배우셔서 시대의 흐름에도 편승하신다.
자식들이 보기엔 채소만 드시는 것 같은데 몰래 고기라도 드시는지(하하) 에너지가 넘치시는 울엄니. 사람은 죽을 때까지 움직여야 한다며, 지금도 노인일자리를 찾아 당신 스스로 동분서주하신다. 어르신들 복지정책으로 어찌 보면 형식적인 일자리인데도, 당신 할 일을 어찌나 꼼꼼하게 잘하는지, 주민센터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본받으실 어르신이라며 정말 좋아한다. 채식주의자에 인품이 선하시다고 누군가 '착한 소'라는 별명을 지어줬는데 정말 찰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엄니에겐 애지중지 자식보다 더 아끼고 위하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엄마의손아래 올케 외숙모다.외숙모도 사람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종사촌들이랑 방학 내내 외가댁에서 들들 볶아치며 일거리를 만들어줘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군식구 뒤치닥거리를 하셨다.아니 즐겨하시는 것처럼 보였다.내가 기억하기엔 외가엔 친척들 외에도 동네 사람들을 비롯 늘 사람들이 넘쳐났던 것 같다
유년시절 나는 삼단 같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길렀는데, 막내 고모는 매일 무릎에 앉혀놓고 한 갈래로 땋아 빨간 댕기를 드리워줬다. 외숙모도 마찬가지셨다. 햇살이 잘 드는 뜨락에 앉혀놓고 섬집아기나 오빠 생각을 부르며 참빚으로 머리를 곱게 빗고 쓰다듬다 끝내 빨간 댕기를 드리우며 하시는 말씀은 그랬다.
"아이고 어디서 요렇게 예쁜 게 태어났을꼬. 집에 가지 말고 외숙모랑 같이 살자 아가 응?"
외삼촌이랑 다투고 나면 늘 엄마한테 하소연을 하면 엄마는 백번이면 백번 다 외숙모 편을 드셨다. 외삼촌은 누이한테 섭섭하다면서도 내심 든든해하는 눈치셨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자식 다섯을 모두 대학 졸업을 시킬 만큼 교육열도 남다르셨다.
하루도 허리 펼 날 없는 외숙모가 가엾다며 엄마는 어른들 언어로 끓탕을 하셨고, 외숙모 일손 덜어준다며 하절기를 외가에서 보내기도 하셨다.
그렇다고 외숙모가 엄니보다 연배가 한참 아래도 아닌 겨우 두살 차이였는데 칠순이 되고 팔순이 되어도 엄니에겐 늘 아픈 손가락이었고 아픈 심장이었다.
엄니도 외숙모도 팔십 중반을 넘었고, 외삼촌을 먼저 떠나보낸 외숙모는 요양원에서 의식 없는 상태로 수년을 지냈다. 다리 힘이 약해진 엄니도 장거리 외출이 부담스럽게 되었다.
딱 한 번만 외숙모를 보고 왔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엄니의 마음을 외면한 코로나 정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나눌 여지도 주지 않은 채 하늘이 먼저 부르고 말았다. 그나마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외숙모 소망은 성(형, 언니)을 한번 보는 거였었다는 소식을 접한 엄니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늦게 외숙모 부음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향하는 내 마음도 복잡했다. 사는 게 바쁘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찾아뵙는 것을 잊어버렸던 나는, 죄송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동반한 후회가 밀려왔다.
외숙모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외사촌들 손을 잡고도 단 한마디 하지 못할 만큼 슬픔이 밀려왔다.
요즘은 문상을 가도 슬픈 마음이 드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문명의 이기에 떠밀려 살다 보니 어쩌면 인간의 감정 농도가 옅어지고 분산된 탓일지도 모른다.
복닥거리며 살던 일상을 가장 잘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은 찰나를 살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생의 고리앞, 즉 죽음 앞에서이다. 오로지 生과 死만 있다면 인간은 한없이 사악해질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을 단편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과 사만 존재하는 것처럼 섬뜩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엄마랑 외숙모는 시댁, 시누이, 올케로 형성된 사회적이거나 관습적 고리가 아닌 마음의 온기로 맺어진ㅡ어쩌면 친자매지간 보다 끈끈했기에ㅡ사람과 사람의 情, 즉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善한 인간관계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참된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도 울 엄니의 기도는 하루 이틀만 앓다 좋은 곳에서 먼저 떠난 이들과 조우하는 일인데, 외숙모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리움에 기도는 더 절절해졌다.
외숙모! 참으로 고생 많으셨어요. 바보 같지만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 이렇게라도 드리고 싶어요. 그곳에서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