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로 아파트 문을 연다. 촌스럽긴 하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최대한 치장한 노력이 여실하다. 붉은색 커튼과 낡은 카펫, 엉성한 아파트 구조, 그런데 묘하게 끌린다. 바닥은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수면 양말을 챙겨 신는다. 주방엔 취사도구는 있는데 가스레인지가 없다. 커피포트 하나만 달랑. 너무 추워 짐을 풀 생각도 못 하고 코트를 껴입는다.
실망의 빛이 더 큰 일행들, 할 말을 잊고 멀뚱히 건너편 아파트 옥상만 바라본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 벽엔 여러 겹의 줄을 그리며 회색으로 덧칠된 비둘기 똥이 낙서처럼 보인다. 목욕탕을 들여다보고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다.
엉덩이 하나 집어넣기도 좁은 공간, 5cm 정도 높이에타일을 사각으로 쌓았는데 아마 욕조인 모양이다. 그 옆에 물걸레는 때에 찌들어 킁킁한 냄새가 난다. 시린 손을 작은 전기난로 곁으로 모은다. 되다 말다 하던 드라이어를 가져왔는데 시험 삼아 작동해 보니 회생 불능 상태다.
벽면에 있는 문을 열어젖히니 놀랍게도 술 창고다. 값비싼 와인과 양주들이 가득 찬 그곳을 바라보던 서버는 ‘아마 알코올 중독자인 모양이야. 하하하. 다 비싼 술들이지. 은행에 다니는 남자인데 주말에는 부모님 집에 가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게 아파트를 빌려주고 돈을 받지. 절대 마시면 안 되고 다만 눈으로만 구경해야 해.’라며 우리에게 줄 선물이 있단다. 종이봉투에서 꺼낸 선물은 모로코 와인이다. 술맛을 잘모르지만 정말 형편없는 맛이었다.
메디나 풍경
당장 헤어드라이어가 필요해 메디나 구경을 나선다. 우리나라로 치면 재래시장이다. 메디나 가는 길엔 깡마른 고양이들이 버글대고, 비굴한 눈빛으로 여행자를 바라보던 개들이 꼬리를 감춘다. 70년대 우리나라에서 타다 버린 것처럼 낡고 찌그러진 버스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난민 같다. 헬멧 미착용, 무단횡단, 빈번한 사고 현장, 뭐하나 지키는 게 없으면서 인샬라! 라니 이건 좀 어이가 없지 않나.
종군기자가 되어 전쟁터를 헤매는 기분이다. 모자이크처럼 거리를 빼곡히 메운 차와 인파들, 풀풀 날리는 먼지와 토사물, 우중충한 질레바 속 사람들, 난 그 순간에도 풍경을 담아보려 애쓰지만 비싸기만 하고 사용방법이 복잡한 카메라를 포기하고 스마트 폰을 사용한다.
올리브와 올리브유가 정말 맛있다
코닥 필름 간판이 정겨워 초점을 맞추는데 “마담! 마담! 시크릿.!”소리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남자, 난 기가 막혀서 뭐가 비밀인지 네가 더 비밀스럽다.난 네 가게에 관심 없고 날아가는 새를 찍었는데 뭘? 소리치며 째려보니 주춤한다. 사실 몰래 몇 장 찍긴 했다.
메디나는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했다. 30년 전쯤으로 후진한 것 같은 풍경 속을 걷는 나의 시간도덩달아 느려졌다. 헤어드라이어를 파는 가게를 찾다 겨우 한 군데 발견했는데 딱 하나 남았다며 벽에 걸려있던 크고 무식하게 생긴 걸보여 주는 주인, 새것인지 중고인지 구분이 안 간다. 우리나라 돈으로 3만 5천 원이라니 기가 막혀 흥정할 생각도 아예 안 하고 단칼에 돌아서니 다급하게 부르는 남자,
“마담 2만 5천 원”
“비싸”
“마담! 마담! 2만 원”
“비싸”
“마다~~암! 1만 5천 원”
난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가게 주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아마 그 가격도 잘 판 모양이다. 리어카에서 파는 만다린과 아보카도, 오렌지를 삼천 원어치 사니 엄청 많다. 만도린의 터지는 과즙과 당도에 탄성도 터졌다. 춥고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 웃으며 먼저 인사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과일이 정말 싸고 당도가 뛰어나다
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올리브 가게 앞에 서성이다 한 보따리 산다. 거리를 활보하며 그 짠 올리브를 많이도 먹었다.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거리엔 자욱한 먼지와 매연과 무질서한 사람들과 당나귀, 말과 마차, 차와 마약 하는 소년들이 뒤엉켜 여전히 무법천지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데 난 그 도시가 묘하게 끌린다.
이따금 지나가는 현대차와 쌍용차에 반가움을 표한다. 무엇을 쫓는 듯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축 처진 모습으로 차도에 앉아 꼼짝을 안 한다. 배가 고픈 걸까. 안아서 옮겨 주려 손을 뻗치니 누군가 더럽다고 소리치고 그 틈에 고양이는 비척이며 메디나를 향해 기어간다.
장거리 비행에 지치기도 하고 배도 고프다.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대서양 연안에 위치 한 Corniche 비치로 향한다. 지옥을 물린 연안은 한산하고 아름답다. 해면 위에서부터 시작된 구름은 가늘고 길게 하늘 속살을파고든다. 태양이 지평선 끝으로 훌렁 재주를 넘는 틈을 이용해 구름도 제 몸을 붉게 채색한다.
노을의 여분 속에 자연과 사물과 사람들은 실루엣으로 밤의 풍경을 준비한다. Sea food 레스토랑 내부엔 수십 년은 됨직한 올리브 나무가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속이 편치 않다. 카사블랑카 시내를 돌아다니며 보았던 토사물들과 당나귀 똥 등의 냄새들이 이미 위장을 뒤집어 놓았나 보다. 그 비싼 음식들 앞에서 난 토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고 결국 생선 한 토막 먹는 것으로 저녁 식사는 끝이 났다.
이토록 몽환적인 풍경을 앞에 두고 떠나기가 아쉽다. 해변을 마주하는 카페에서 와인 한잔을 주문한다. 코에 대기도 전에 역하게 올라오는 향에 결국 화장실로 달려간다.
안쓰러웠는지 카페 주인이 속을 달래 줄 거라며 커다란 유리잔에 풀잎처럼 생긴 약초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준다. 마시고 오 분쯤 지나니 신기하게도 속이 가라앉는다.
겨울임에도 불어오는 훈풍에 얇은 스웨터 하나만 걸치고 해변을 걷는다. 내가 살던 시간과 세상들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난 지금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사유하는 여행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