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이라도 했던 걸까. 난 10시가 넘도록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해는 중천이 아니라 이미 한낮이 되어버렸다. 오늘 일정을 망친 건 아닐까 미안하고 불안한 마음에 부리나케 일어나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연신 미안하다 사과하는 내게 괜찮다며 쉬는 것도 여행이니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즐기라는 가이드. 쉬는 게 뭐가 문제냐며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며 즐기란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강박증이 심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모든 걸 내려놓고 느긋하게 쉬고 먹고 마시고 걷고 하란다.
페즈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냥이
일행들은 이미 페즈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진 난 아침 식사를 위해 로비로 내려간다. 늦도록 내려오지 않는 나를 무척 걱정했다는 청년은 약차를 가져다주며 괜찮냐고 몇 번을 묻는다. 올리브, 올리브 오일, 꿀, 버터, 과일잼이 그림처럼 식탁 위에 올라앉는다. 모로코 전통 수프인 하리라를 쉐프가 직접 내 온다.
잡식성인 내가 게눈 감추듯 먹은 하리라 수프와 빵(빵 이름 모름)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하리라의 은근함에 한 그릇을 더 비운다. 우리나라 녹두죽과 흡사한 맛이다. 부대끼던 위 벽에 약을 바른 듯 편안하다. 종잇장처럼 얇고 동그란 빵을 올록볼록 엠보싱 모양 눌렀다. 그 위에 꿀을 얇게 펴 바르고 다시 올리브 오일을 쏟다시피 덧발라 한입 베어 무는데 이게 뭐야? 꿀과 올리브 오일이 만났고, 그 둘은 형용키 힘든 궁합이었다. 더 먹을 수 있냐 묻는 나, 청년과 쉐프의 입은 귀에 걸린다.
페즈 골목 안 대장장이의 풀무질 소리
위장은 화를 삭이고 식욕은 살아났다. 시간은 오후 1시를 향한다. 어제 미리 싸 둔 짐을 청년은 이미 로비에 곱게 내려다 두었다. 팁을 건네는 나의 손을 겸손하게 제지한다.
여긴 천년의 도시 패스다. 호텔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메디나로 향한다. 자신의 몸보다 서 너 배 더 커다란 짐을 싣고 걸어가는 당나귀들,
‘덩키(Donkey) 덩키, 똥, 똥 조심해.’ 피해 걸어야 할 만큼 널린 게 당나귀 똥이다. 9 천여 개의 미로로 얽힌 메디나, ‘챙, 챙, 챙, 챙’ 거리에 퍼질러 앉아 양철을 두드리는 대장장이 소년, 색채의 나라답게 총천연색의 물감이 즐비하다.
페즈시내ㅡ당사귀 사진에 집착했는데 사진이 다 사라졌는지 없다
골방 같은 곳에서 쟁반만 한 빵을 화덕에 구워 들고 나오는 남자의 등이 새우처럼 굽었다. 빵을 사려는 사람들은 줄지어 서 있다. 남자는 쟁반만 한 빵을 여러 조각으로 자른다. 비좁은 골목으로 작고 늙은 노새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의 서너 배쯤 되는 짐을 싣고 걷는데,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 그들의 운명이란 당연할 걸까.
여행하다 보면 가끔 스치는 풍경에 아파 힘겨울 때가 있다. 중국 황산 여행 중 눈물을 흘리는 말의 모습을 본 후 난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경주마로 뛰던 청년 말은 늙으니 쓸모가 없어졌고, 은퇴해서 쉬어야 할 시기에 공사현장에서 나온 돌을 옮기는 작업에 내몰렸다.
죽을힘으로 버텨도 지기 힘든 돌의 무게에 눌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리던 노마의 슬픈 눈동자는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했다.
문득 난 메디나를 벗어나고 싶었다. 오던 길을 기억해 되돌아 나간다. 채소를 파는 상인들의 무리 속에 섞여 있다 구두를 닦는 노인 옆 의자에 앉는다.
열쇠고리를 흔들며 5유로를 외치던 소년은 골목에서 끝까지 집요하게 나를 따라온다. ‘너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니?’ 2유로를 주고 열쇠고리를 받아 든다. 지나친 동정과 친절은 어쩌면 이 아이들의 미래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페스의 겨울 하늘이 푸르다. 호텔에서 짐을 찾고 청년의 손에 엽서 몇 장을 건네준다. 이별이란 어떤 형태로든 먹먹한 것인가 보다. 골목에서 소년들이 나타나 짐을 낚아챈다. 이프란(Ifran)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