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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ㅡ별꽃 Jun 29. 2022

신사와 아가씨(3)

신사와 다방에서 커피 한잔


약속

발목까지 내려오는 옅은 하늘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그녀 뒤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뜀박질이 끝난 탓일까. 서쪽 하늘에 걸린 은 노을은 왜 그리 쓸쓸해 보이는지. 서소문에 있는 코러스에서 노래도 부르고 시원한 맥주도 마시며 놀다 가자는 직장동료 은미와 정아의 제안을 괜히 거절했나 싶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려 주워 먹을 것도 없는 땅을 바라보며 힘없이 걷는 그녀 발치 아래 늘어진  그림자가 그녀의 그림자를 가로막는다. 지난번 그 신사였다. 긴장하는 그녀. 파조의 대화가 오간다.


"왜 이러세요!"

"아가씨! 딱 커피 한잔만 합시다.!"

"안돼요. 지난번 물벼락 맞고도 이러세요."

"시원하고 좋던데요. 그래도 두 분께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아가씨를 잘 지켜주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커피 한잔하자, 싫다, 제발, 싫다, 옥신각신 끝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오늘 이후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둘은 다방으로 향했다. 족히 180cm는 넘게 보이는 건장한 체구에 양복을 입었는데도 균형 잡힌 탄탄한 근육이 남다르다 생각되었다.



방레지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동네 다방, 꿉꿉한 습기에 섞인 담배냄새가 역하게 올라오는데 딱히 다른 다방도 없어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연지곤지 정신 사납게 화장을 한 레지(그 당시엔 서빙하는 종업원을 그렇게 불렀다)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민망정도로 란하게 껌을 씹으며 뭐  마실 거냐 묻는다.

"커피 한잔 주소."

"저도요."

레지는 혀로 껌을 입 밖으로 쏙 밀어낸 후 입얄밉게 오무린후 껌 속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어 부풀리더니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아당겨 톡 터트린다.

"알았어요~~~ 오. "

하며 윙크를 날리는데 시뻘건 립스틱이 입술 아래로 번져 꼭 피에로처럼 보였다.

"아 참. 저는  안민이라고 합니다. 스물여덟 살이고 직장은 삼청동에 있고 숙소는 정릉에 있습니다."

"제 이름은 모르셔도 되고요. 그런데 저를 왜 따라다니시는 거예요?"


신사는 그날이 비번이었고 이발을 할 때가 되어 서울구경이나 할까 싶어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고 나선길이 그녀 동네였다. 이발을 하고 골목을 내려오다 전봇대에 기댄 채 서 있던 그녀를 보는 순간 세상에 저렇게 청순한 아가씨도 다 있나 싶었단다.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고 물벼락을 맞고 나니 오기도 생기고 그녀가 아른거려 잠을 잘 수도 없었다고 했다.

"언니야~~ 남자들은 다 도둑이야.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조심해."

둥근 알루미늄 쟁반에서 두 잔의 커피를 내려놓으며 야릇한 미소를 짓던 레지는 한마디 덧붙인다.

"아이고 오빠야 같이 생긴 남자랑 연애 한번 하고 싶다."

레지는 더 큰소리를 내며 껌을 씹었고 주방 앞 둥근 간이의자에 앉아 두 사람에게 시을 고정시킨 채 입안의 껌을 오른손으로 잡아당겨 직직 늘였다, 풍선도 불다, 따발총 소리를 내기도 했다.



킨과 만년필

인터넷 캡처

안 그래도 낯설고 긴장되고 조심스러운 자리인데 타인의 불경한 시선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픈 건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사는 그날 이후 계속 비상이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부하들을 교대로 보내서 그녀를 지켜주라는 부탁을 했는데 아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급하게 약만 전해주고 간 거라며.

"부하? 비상? 직업이 군인이에요? 경찰이에요? 혹시 조폭?"

그녀는 물었다. 신사는 다음에 알려주고 싶은데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녀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 가야 한다며 서두르는 그녀에게 신사는 잠깐 기다리라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냅킨 위에 숫자를 적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우리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시는 ㅇㅇ고등학교 교장실 전화번호입니다. 전화 걸어서 내 이름을 대면 좋아하실 겁니다."

본인 전화번호도 아니고 아버지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신사가 너무나 이상했고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부는 바람 골목길 담장 위에 걸친 감나무 이파리 흔다. 그날따라 가로등 불빛 창백하게 느껴졌다. 신사는 그녀가  고모집 근처 골목을 꺾기 전까지 말없이 따라. 고모집 작은방에 웅크려 앉은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신사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진ㅡ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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