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던 내 심장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나는 리모트컨트롤을 들고 지나간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물론 조용히 읊조리는 듯한 말투, 상대를 응시하는 깊은 눈매, 아무리 되돌려 봐도 딱 그였다.
<원더풀 라이프>의 주인공 이우라 아라타는 그렇게 내첫사랑의 쌍생아가 되어가슴속으로들어왔다.
영화는 저승으로 들어가기 전 일주일을 머무르는 간이역쯤의 중간지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 막 이승을 건너온 망자들은 뿌연 안갯속에서 문을 통해 걸어 들어오는 실루엣으로 포착된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라는 안내인의 멘트, 담소를 나누는 모습, 제각기 면접실로 불려 들어가는 망자들, 그것은 이승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죽음과 다른 모습이 오히려 낯섦으로 다가온다.
망자들은 각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온 날 중 앞으로 영원히 자신이 간직하게 될 한 컷을 남기기 위한 순간을 선택해야만 한다. 선택한 영상을 재현하기 위해 그곳 직원들은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분주해진다. 토요일에는 모두가 극장에 모여 관람하고 그것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 그 추억만을 안고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 직원들 중 아라타가 분한 주인공 모치즈키는 젊지만 누구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비춰진다. 그의 고객 중 한 명인 와타나베는 나름 성공한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취미도 없이 71년의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온 노인이다. 그만그만한 직장생활, 그만그만한 결혼생활, 자식하나 남기지 않고 무엇하나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는 그가 선택을 망설이게 되고, 모치즈키는 그러한 그를 위해 일생이 촬영된 비디오테이프를 주문해 제공해 준다.
1년에 하나씩 71개의 비디오를 보고 있는 와타나베의 곁에서 상황을 살피려 잠깐 들렀던 모치즈키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신혼의 젊은 와타나베 아내를 보는 순간 평온하던 모치즈키의 표정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무슨 사연이 있음을 암시하며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담당을 바꿔주기를 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에 와타나베가 선택한 것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긴자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갔다 들러서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순간이다.
와타나베가 선택 시간이 늦어졌음을 사과하자 모치즈키는 여기 있는 직원들은 아예 선택조차 하지 못한 망자들임을 고백한다. 와타나베와 1923년생으로 동년배지만 젊은 나이에 전사해서 그런 외양을 하고 있노라고. 와타나베는 그런 모치즈키에게 선택하지 못한 것인지 선택하지 않은 것인지를 묻는다.
선택하지 않는 책임방식도 있지 않을까요?
토요일, 재연한 촬영분을 극장에 한데 모여 관람하고 이번주 업무를 마친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다가 그가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와타나베 자신은 모치즈키가 전사하기 전의 정혼자, 교코의 남편이었음을 고백하며 모치즈키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친절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내용이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 이미 모치즈키의 존재를 알려왔고결혼 후에도 그녀는 매년 모치즈키의 기일마다 성묘를 가서 이름과 기일 날짜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한다. 그는 교코의 기억 속 모치즈키를 질투했으나 그런 감정을 극복할 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했기에, 이곳에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모치즈키가 와타나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친절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도 아닌, 바로 자신이 상처받는 게 싫었음을 모치즈키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동료 시오리에게 실토한다. 교코가 와타나베에게 고백을 하고 정혼자가 있던 교코를 그가 받아들였 듯이 모치즈키 자신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었노라고.
시오리는 혹 모치즈키가 인식하지 못하는 교코와의 인연을 찾아 교코가 선택한 순간의 영상을 뒤지기 시작한다.
결국 교코는 남편이 선택했던 공원 벤치에서 모치즈키가 입대하기 전 제복을 입고 함께 앉아 있던 순간을 선택했다.
시오리는 모치즈키가 다른 망자들처럼 '선택'을 통해 자신이 존재하는 이곳을 떠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교코의 선택을 찾아준 것을 후회하며 자신은 모치즈키를 잊지 않기 위해 영원히 선택을 하지 않겠노라 한다.
모치즈키는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이었음을 깨달은 이곳 세트장에 앉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었던 순간을 선택한다.
일요일, 주일의 마지막 날 직원들은 모치즈키의 선택을 위해 휴식 대신 촬영을 시작한다. 세트장의 조명은 모치즈키를 비추고 그는 벤치에 앉아카메라를 응시한다. 이어 직원들은 다같이 모치즈키의 영상을 관람하고 그 순간이 선명해지면서 그는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
자신이 간직하고 싶은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게 되는 진정한 천국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도 첫사랑을 꼭 빼닮은 아라타를 발견한 충격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만화 원작의 탁구를 소재로 한 <핑퐁>은 그래서 보게 된 영화였다. 스마일, 웃지 않아서 스마일로 불리는 츠키모토는 더욱 말수가 없는 아라타였다.
한국 여배우 배두나가 주연을 맡았던 일본영화 <공기인형> 준이치의 눈빛은 공허했고, 북송되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가족의 나라> 성호로 분한 이라타는 정체성을 상실한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난 영화 <익스트림 스키야키>는 대학 졸업 이후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방황하는 호라구치의 역할을 맡았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찾아 나선 아라타는 이제 살집이 붙어서 느물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아라타를 끊지 못하는 이유였다. 세월이 지나고 그런 아라타를 보면서 내 첫사랑도 그렇게 나이가 들고, 대충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여기며 아직도 그가 나오는 영화를 찾아 나선다.
원더풀 라이프는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적 의미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나는 아라타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가끔 틀어 놓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본 원더풀 라이프의 모치즈키는 처음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에 비해 많이 낯설다. 이제 젊은 아라타의 모습은 오히려 내게 생소하게까지 느껴진다. 내 첫사랑의 모습이저랬었구나, 하며 바라볼 뿐 그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란 그토록 간절했던 사랑의 모습을 지워버릴 만큼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그 첫사랑과 헤어지고도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던 8년 만에 다시 만났었다.
왜 그렇게 아무런 변명조차 없이 떠나야 했어?
사업하려면 뒷배가 든든해야 되니까.
결국 든든한 처가를 갖고 싶어서 나를 떠난 거였다. 하지만 나도 이해한다. 구질구질한 타인의 삶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을 그의 심정을. 나도 나를 둘러싼 내 껍데기를 버리고 싶었으니까.
언젠가 친구의 결혼식이 끝나고 첫사랑과 함께 갔던 근처 마로니에 공원의 레스토랑에 혼자 들렀었다.
그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 그토록 빛나던 조명들, 우리를 위한 축가처럼 여겨지던 음악들, 그가 좋아하던 타탄체크무늬의 테이블보, 돈가스 곁에 놓인 맥주잔의 거품이 넘쳐흐르자 아까운 마음에 황급히 입술을 가져다 대던 나, 그런 나를 지켜보며 가슴 떨리는 미소를 짓던 그...
하지만 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 홀에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저분하게 얼룩진 테이블보, 어두컴컴한 조명, 정신 사납게 쏘아대는 노래 가사, 차마 입에 대지 못하고 식어서 뻣뻣해진 돈가스,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자니 울컥 눈물이 토해져 나왔다.
거지 같애!
하지만 거지 같이 쓰레기통에 던지진 삶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은 존재하는 법이다. 영원히 머물고픈 순간, 나는 그 레스토랑에서 가로막힌 테이블 때문에 애달파하면서 서로를 갈망하던 눈빛을 주고받던 찰나를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