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한 중년의 사내가 휘파람을 불며 교실 앞문으로 들어서더니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산만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기 시작한다. ‘전통’ ‘명예’ ‘규율’ ‘최고’의 교훈을 내세우는 웰튼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을 타파하려는 키팅 선생의 첫 수업 시간, 그는 아이들을 교실 밖 선배들의 사진과 트로피가 진열된 홀로 불러세운다.
오 캡틴, 마이 캡틴!
키팅 선생은 학생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 미국의 위대한 시인 월트 휘트먼이 링컨을 추모하며 불렀던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우리의 선장 키팅은 그렇게 학생들을 데리고 자유를 향한 항해를 시작한다.
시간이 있을 때 봉우리를 거두라.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왜냐하면 여기 사진 속 선배들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이 순간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들릴 것이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속삭임으로 영혼의 목소리를 전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
‘시의 완성도를 가로축에 놓고 중요도를 세로축에 놓으면 그 시의 위대함은 완성도와 중요도의 영역이 된다. 이러한 이해도를 높이면 시를 읽는 기쁨이 느껴질 것’이라는 서문 따위는 쓰레기라며 찢어버리라는 선장의 말에 따라 학생들은 서문을 모조리 찢어서 바구니에 내던진다.
시는 재는 것이 아니다. 비밀을 말하자면,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법률, 의학,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을 향해 시의 진정한 의미를 전파한다.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내가 다니던 여자고등학교는 지방 도시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신설 학교였다.
첫 등교 하던 날, 꼭두새벽 등반을 하듯 언덕을 올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밤에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검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은행나무가 정령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은 시에다 빨간 볼펜으로 난도질하라 일렀고, 붉은 선혈이 가득한 책장을 넘기며 학생들은 그것을 ‘시’라고 배웠다. 나는 그런 가르침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청소 시간이 되면 커다란 쓰레기통을 들고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와 뒷산 쓰레기를 태우던 소각장으로 향해 갔다. 검은 그을음이 솟구치는 불꽃 위로 쓰레기를 털어내고 산꼭대기 언덕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시라고는 믿을 수 없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흔히 나병이라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모여 살았던 곳으로 가끔 학교 앞을 지나 그곳 마을로 들어가는 얼굴이 문드러진 사람들과 마주치곤 했다. 처음에는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해골처럼 텅 비어 있는 얼굴 중앙의 함몰이나 더께를 뒤집어쓴 듯 얼굴의 살점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으나 차츰 그런 외형에도 익숙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의 잘못도 아닌 병으로 천형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추한 몰골을 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싶어 위로라도 건네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되려 그들로 인해 위로받는 것은 나였다. 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저수지가 그나마 내게는 허파가 되어 숨을 쉬게 했고, 저수지가 아니라 호수가 되어 마음에 일렁였다.
나는 연습장에 낙서를 시작했고, 그것은 시라는 이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포부도 당당히 어린 시인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었으나 입시에 목을 맨 학생들에게 시는 난도질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터라 시 동아리 조직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선장 키팅은 웰튼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죽은 시인의 사회’를 결성했다. 졸업앨범 속 프로필을 발견한 학생들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키팅 선생님에게 묻는다. 그는 오래전 인디언의 동굴에서 시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여자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던 어린 낭만주의자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닐 페리를 비롯한 학생들은 다시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재결성하기로 하고, 선장이 고교 시절 그러했듯 헨리 D 쏘로우의 개회시를 낭송한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속으로 갔다.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그렇게 다시 회생한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잡다한 시구를 읊조린다. 누군가 문장에 비트를 싣기 시작하고, 박수 소리와 함께 리듬을 탄 몸짓은 그들 모두를 일으켜 세운다.
황금의 통로가 숲속을 가로지르네.
그때 난 어둠 속에 나타난 콩고를 보았네♬♬
그들은 동굴에서 나와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만의 4가지 교훈 ‘익살’ ‘공포’ ‘타락’ ‘배설’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배설하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존재인 전학생 토드 앤더슨은 이내 캡틴의 레이더에 포착된다.
키팅 선생은 교탁 위에 올라선 채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식을 설파하고 학생들을 하나씩 교탁 위로 끌어 올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책상과 의자를 내려다보며 그들은 이제까지와 다른 시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너희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해. 늦게 시작할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쏘로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으로 산다고 했다. 그냥 가장자리만 빙빙 돌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
그렇게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수업이 끝나고 키팅 선생은 자작시 한 편씩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준다.
“내 야성을 지르노라. 나는 이 세상 지붕 꼭대기에서”
다시 휘트먼이 소환된다.
“야성이란 커다란 울부짖음이다. 토드군, 이리 나와서 야성을 보여주게.”
키팅 선생은 토드를 교실 앞으로 불러 세워 그의 깊은 곳에 웅크린 야성을 불러내려 한다.
야!
겁에 질려 있던 토드가 처음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더니 키팅 선생의 이끌림에 따라 마침내 날것의 울부짖는 포효를 터뜨린다. 키팅은 토드의 눈을 가리고 토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표면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내면의 심연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거침없는 야성을 퍼 올리기 시작한다.
그의 모습이 내게로 와요.
땀에 젖고 이를 드러낸 그가
나의 뇌를 노려보고 있어요.
그의 손이 뻗어와서 내 목을 잡아요.
진실은 발을 차갑게 하는 이불 같은 것입니다.
잡아당겨도 늘어뜨려도 이불은 부족합니다.
무슨 수를 써봐도 이불은 우릴 덮어주지 못합니다.
울면서 태어난 날부터 죽음으로 떠나는 날까지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는 우리의 얼굴만을 덮을 겁니다.
오늘의 수업을 잊지 마라.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토드의 야성은 그렇게 캡틴을 따라나섰던 항해로 완성된다.
“내 친구한테 너 아냐고 물었더니 뭐라는 줄 알아?”
그 무렵 유일하게 어울려 다니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뜨악하니 친구를 쳐다보았다.
“쓰레기 비우는 애.”
그 친구와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는 토요일이면 시내로 나가곤 했다. 시내 유명 만두집에 들러 쫄면을 먹고 나면 카페에 앉아 반장이었던 친구는 전교 석차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수학 문제를 풀고, 나는 책을 읽거나 몽상에 빠져있곤 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고, 집에 가기가 끔찍이 싫었던 나로서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공백을 메워주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어둠이 거리를 점령하는 순간이 되면 그 친구는 다시 밤의 더 깊숙한 저편으로 사라졌다.
알지? 너는 그런 데 어울리지 않아.
나는 그 애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친구는 내게 어디로 향하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와 헤어진 나는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인도의 보도블록을 타고 끝없이 발걸음을 떼다 보면 어느덧 외곽의 인적 없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 생각들은 내 발길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어디론가 흘러가곤 했다. 차츰 부유하던 감정의 앙금들은 침전된 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도시를 배회하다 가족들이 잠들 만한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는 어렵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든 나쁘다고 생각하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키팅 선생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언급하며 획일화의 위험성을 알려주기 위해 교정을 거닐게 하고, 손뼉을 치게 한다.
“달튼군은 걷지 않을 텐가?”
건물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선 달튼을 보며 키팅 선생이 묻는다.
“전 걷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맙네, 아주 정확한 대답이야. 전통에 도전하라.”
달튼은 ‘죽은 시인의 사회’ 이름으로 학교 신문에 손장난을 치지 않기 위해 여학생을 들여보내달라는 기사를 살짝 끼워 넣는다. 교장은 그들의 색출 작업에 나선다. 전교생이 모여 있던 강당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고 달튼은 수화기를 집어 든다.
“헬로우. 네. 계십니다. 교장 선생님, 전화 왔습니다. 하느님의 전화에요. 여학생을 입학시키랍니다.”
“네가 퇴학당하려는 첫 학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교장선생은 달튼의 엉덩이에 방망이를 두드리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완고한 교장은 키팅 선생을 찾아가 전통적이지 않은 교육 방식에 대해 지적한다. 아이들에게 사색을 가르쳐서는 안 되며 오직 대학입시에만 전념하라고 경고한다.
키팅은 달튼에게 퇴학당해서 자신의 강의를 듣는 기회를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조심하라고 일깨운다.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냉기고, 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
“와~~!!!”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사장은 어김없이 연단에 올라가 그 말을 반복했다. 돈이 아닌, 삶에 대해 그가 말할 수 있는 바는 오직 그 한 문장에 불과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이사장의 명연설에 한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아낌없는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함성에 버무려진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행사가 끝나면 시내 유명 제과점에서 공수해 온 빵과 우유가 교실로 날라져 왔다.
어쩌다 보니 돈을 좀 만지게 되고, 학교가 돈을 긁어모은다는 말에 산을 깎아 건물을 세우고 교육 사업을 시작한 졸부였다. 소문에 의하면 교사가 되기 위해 그에게 가져다 바치는 뒷돈으로 억소리가 났다. 물론 실력을 인정받아 들어온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누가 봐도 억소리 내고 들어왔을 법한 교사들도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더러 그런 선생님들을 교무실까지 쫓아가 난해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할 수 없어 난감해하는 표정을 즐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신설된 학교의 교내 분위기는 젊은 선생님들의 열의로 인해 다른 학교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이 감돌기도 했고, 자기 소신을 가지고 교권이나 학생 인권을 강조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교감선생이나 교무주임은 열린 창문 너머나 교실 뒤에서 수업을 엿듣기도 하며 그들을 감시했다. 전교조 열풍이 불어오기 직전이라 수업 내용을 통제하던 시절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리더이자 토드의 룸메이트 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여름 밤의 꿈> 연극 오디션을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아버지로 말하자면 의대에 가야 하는 닐이 졸업 연감 부편집장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겨 편집부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부류이다.
“의대에 가게 되면 그때는 네 맘대로 해. 엄마가 너에게 거는 기대를 알잖니.”
그는 자신의 독선을 아내에게 전가하는 위선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아버지가 닐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학교로 찾아온다. 키팅 선생은 닐이 아버지에게 열정의 깊이를 진실로 고하고 이해시키기를 권해 보지만 닐로서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결국 닐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무대에서 화관을 쓴 채 요정이 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산한다. 그러나 공연장을 찾아와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강고하다. 아버지는 닐을 학교가 아닌 집으로 데려간다.
학교를 자퇴시켜서 육군사관학교에 갔다가 하버드 의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닐의 계획표를 변경하고 연극이라는 짓거리를 그만두기를 명령한다.
닐은 자신의 방 창문을 열고 요정의 화관을 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천천히 2층 자신의 방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아버지의 서재 잠겨있던 서랍을 열쇠로 열고…….
놀라 잠에서 깬 아버지가 닐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권총으로 몸에 총알을 쑤셔 박은 뒤였다.
“맙소사, 불쌍한 내 아들!”
잠자던 토드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룸메이트의 죽음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다. 평온하게 눈이 내리는 교정으로 나선 그들은 여느 때처럼 산책을 나온 학생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교정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은 포근하게 사방을 감싸고 있다.
“너무 아름답지.”
잔인한 현실은 언제나 평온한 형태에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그 애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가 그런 거야.”
토드는 눈이 내리는 교정에서 벌판으로 달려가며 오열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건을 밝히려는 교장은 닐의 아버지가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노라고 학생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아들을 죽인 자신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하는 아버지와 학교의 수치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교장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바로 그에 적합한 인물로 키팅이 주목된다.
“왜 우리 인생을 망쳐, 난 키팅 선생을 망가뜨릴 거야.”
사건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된다.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부추겨서 학생들이 무모하고 제멋대로 행동 하게 만들었다는 서류에 사인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닐 페리를 부추긴 것은 키팅 선생이고 직권남용을 해서 페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키팅 선생은 어떻게 되는 거죠?”
자신의 야성을 끄집어내어 준 선장을 걱정하며 토드가 묻는다.
누구나의 고교 시절이 그렇듯 우리의 수학여행은 특별한 것이었다. 아니, 특별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도모하기로 하고 마지막 날 밤 ‘야자타임’을 준비했다. 누가 주동을 했는지 따위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왔고,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선생님들을 하나씩 방으로 불러들여 반말로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다며?”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남자 친구는 있어?”
“응.”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신설 학교인 만큼 젊은 2, 30대 선생님들 역시 우리의 특별한 수학여행을 위해 기꺼이 동참해 주셨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어 선생을 불렀다. 그 여선생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딱히 발톱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알잖는가, 기껏해야 반말 조금 지껄인 걸 가지고 쪼잔하게 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쪼잔한 발톱은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드러났다.
처음 그녀는 반장인 내 친구를 불러 주동자의 이름을 추궁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따위는 기억할 리 없었다. 친구는 우리에게 와서 난처한 듯 그 사실을 알렸다. 누구인지 자수하지 않으면 반 전체에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라며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어쩔 거래?”
“기말고사 점수를 반 전체 감점할 거래.”
잔인하게도 마녀는 우리가 무엇에 가장 취약한지 알고 있었다.
모두 점수 몇 점을 날리지 않기 위해 그날의 일들을 기름 짜내듯 복기하려 했고, 누군가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거된 이름들은 하나씩 옥상행이었다. 마녀도 안 것이다. 그런 일 따위를 교무실에서 떠벌리면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 인간이 되는지를.
그래서 옥상으로 불려 간 아이들은 굴욕적인 마녀의 배설을 견뎌야 했고, 평소 문제아로 일컬어지던 그 아이들의 보스역을 자처하고 있던 반장이 나서서 중재에 들어갔다.
2학년이 되면서 그들 중 하나는 남자 친구를 따라 서울로 가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알잖는가, 어느 학교나 남자에 눈먼 애들 하나쯤은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런 일쯤은 암것도 아니라는 것을.
별일은 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친구에게 들은 얘기였다.
부모님 모두가 공무원이라 보수적이셨던 그 친구는 서울로 올라오지 못한 채 지방의 국립대학 사범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아빠의 빚잔치를 하고 엄마와 단둘이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던 나는 몇 번인가 고향이랍시고 내려가 그 친구를 만나곤 했다.
“걔들은 어떻게 지내?”
무심코 야자타임 주동자들의 안부를 물었다. 서울로 남자 친구를 따라 올라간 애는 그나마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고 했다.
“L은 호텔 콜걸로 일해.”
“걔가 왜?”
뒤늦게 공부해서 그나마 전문대라도 들어갔던 애였다. 집안 형편도 괜찮았고, 예쁘장하니 눈웃음치던 눈매가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게 오히려 문제였나?
여하튼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너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아.”
토요일 밤이면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친구가 막연히 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듯, 나 역시 그런 곳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듯, 가보지 않은 길이란 있기 마련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는 어렵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든 나쁘다고 생각하든.'
내가 키팅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친구 역시 사범대를 나왔으니 키팅 선생과 같은 길을 가고 있을지 밤의 경계에 있다 그 세계로 빠져들었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아직도 낮과 밤의 경계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학교를 떠나게 된 키팅 선생은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러 교실로 들어선다. 임시수업을 맡은 교장은 학생들이 찢어버린 서문을 다시 가르치는 중이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교실을 나서는 선장을 향해 야성을 드러낸 토드가 책상 위로 올라선다.
토드에 이어 하나둘씩 책상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캡틴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선장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하지만 세상이 늘 그렇듯 책상 위로 오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학생들도 반쯤은 존재한다. 물론 그들도 책상 위에 오르지 않을 권리쯤은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비굴한 선택일 망정 선택은 선택이다.
단,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다. 그게 콜걸이든, 우리의 항해를 이끌어줄 선장이든 결코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방식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비굴할지언정 결코 비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 전교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 2,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전부 전교조에 가입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셔야 했다. 국사를 가르치시던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사모님이 배추 장사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어느 날 그곳에 내려갔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그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환히 웃고 계시는 게 무척이나 반가워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마음이 닫혀 있던 때라 함께 웃음 지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분으로서는 힘든 시기였을 텐데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다.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다. 키팅 선생이 속삭이던 삶의 비밀, 과연 이 시대에 시는 존재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중력의 힘으로 버티며 닳을 대로 닳아버린 나는 다시 연습장에 시를 끄적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