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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편 Jan 20. 2024

안녕, 소중한 나의 아저씨

원더풀 라이프

나의 아저씨가 떠났다.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하필이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다시 책장에서 꺼내 읽던 무렵이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하얀 어둠 속에 갇힌 채 눈이 멀어 버린 것만 같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황망한 마음에 무엇을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나의 아저씨>를  놓은 채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몰입하지 못하고 무심히 흘러가는 장면들은 겉돌기만 했다. 그러다 중저음으로 흘러나오는 아저씨의 말이 송곳처럼 명치에 박혔다.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이 말해 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 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걔의 지난날들을 알기가 겁난다.

불현듯 이제는, 나의, 아저씨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의 멍울처럼 치받고 목울께로 넘어왔다. 


처음 <나의 아저씨>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을 잘 켜지 않는 나는 늘 그렇듯이 나의 아저씨를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드라마가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할 때 역시 그저 세간의 시선을 끄는 정도로만 여겼다. 여주인공과 아저씨의 관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미성년자를 강간하는 소설에서 비롯된 은유의 '롤리타' 논란에 휩싸일 때조차 가십거리 정도로만 일축한 채 내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드라마가 끝이 난지 2,3년이 지나고 누군가로부터 인생드라마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상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인생드라마 운운은 내 귀를 솔깃하게 했고, 그제야 나는 넷플릭스에서 허겁지겁 나의 아저씨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빚을 떠안은 채 고리대금업자의 폭력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지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그녀의 불만 가득 찬 눈초리는 젊은 날의 나를 고스란히 가져다 놓은 듯했다. 없는 게 차라리 나았을 법한 부모, 울타리 없는 세상을 혼자 싸우며 버텨야만 했던 어린 날, 상처받아서 일찌감치 커버렸던 아이, 그게 나였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판이하게 다른 지점이 내게는 살아오는 동안 '나의 아저씨'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뭐 걱정거리 있으면 편하게 말해."

설마, 설마, 설마마, 했지만 결국 또 올 게 오고 말았다. 댁들이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내 얼굴을 구겨놓지 않았느냐는 항변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테이블에는 주머니에서 꺼낸 돈뭉치가 올라와 있었다. 

"돈이라면 말만 해."

물론 사는 동안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곳에 놓여 있을 때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정액이 묻은 것 같은 불결하기 그지없는 종이더미에 불과했다.

미심쩍은 직원들 일로 물어볼 게 있다며 조용히 오라고 불러내더니 그런 말 따위는 언급할 리가 없었다 

"부담 가질 것 없어. 그냥 여행이나 좀 다니고 말벗이나 해주면 돼."

어거지로 눌러 앉히고 있던 엉덩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좋아. 오백 세 잔만 마시면 보내 주지."

첫 잔은 원샷, 둘째와 셋째 잔은 투샷으로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지금이야 숨이 차서 엄두도 못 내는 일들이 젊음이라는 마법의 에너지 속에서는 가능했다. 호프집 문을 박차고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기어이 택시에까지 올라 탄 나의 개 같은 아저씨는 내가 취기로 의식을 잃고 정신줄을 놓기를 바라마지 했을 터이나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너, 굴러온 복을 찬 거다."

"사장님 실수하신 겁니다."

집으로 가는 짧은 동안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고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에 이르렀고 나는 비로소 집 어귀에서 내릴 수 있었다. 풀려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간신히 언덕을 기어오르다시피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나는 또다시 마음의 빗장을 걸고, 집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매번 내 젊은 날이란 그런 구질구질한 일들로 채워지고 말았다. 그때마다 한없이 몸을  웅크린 채 숨죽여야만 했다. 

세상 누구도 내 편이 아닌 절망감, 위로가 되기는커녕 모진 말로 나를 들쑤셔대던 나의 개 같은 아저씨, 아줌마들, 지나온 날들은 길고 긴 터널이었다.

더 이상 이 판때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나이 들 거 생각하면 끔찍하죠?"

나의 천사 같은 아줌마 정희가 지안에게 물었다.

"저는 빨리 그 나이 됐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덜 힘들 거잖아요."

그랬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라는 더께를 뒤집어쓰고 맷집이 생기면서 나 역시 인생은 덜 힘들어졌고, 한 아이라는 생명의 울타리가 되어야 했던 굴레는 나를 단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고 가슴에 생채기가 날 때면 텔레비전을 켜고 넷플릭스를 뒤져 나의  아저씨를 만난다. 


요순이라는 노인의 삼 형제 중 둘째 나의 아저씨 동훈을 비롯해 일찌감치 명퇴당하고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고학력 빙신 중 첫째 상훈, 떠오르는 신예 영화감독이었으나 실패하고 반백수로 지내는 막내 기훈, 후계동의 사랑방 같은 <정희네>의 여주인 정희, 저녁이면 그곳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녹록지 않은 일상을 털어내는 후계동의 주인들. 그들은 하나 같이 우리네의 모자란 자화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현실 속 우리와 다른 점은 그들 각자가 아니라 그들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우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도 저 판때기에 끼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면 이내 시린 가슴 한구석에 훈훈한 온기가 돌고 벼린 날이 누그러지곤 했다.


그런 아저씨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토록 사람들을 배려하고, 드라마 속의 아저씨처럼 따뜻하고 소탈해 보이던 배우 이선균이 생의 너머로 사라졌다.

기자들 앞에 서서 날 것 그대로 노출 돼 있던 검은 낯색이 떠오른다. 새카맣게 타들어갔을, 애간장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가 그토록 고통받는 동안 우리는 모두가 침묵했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으로 저작거리에 세워 놓은 채 카메라를 들이대고, 법이라는 칼날로 그를 난도질하는 동안 우리는 그저 천박한 관음으로 흘끔거리며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나의 아저씨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을 단 한 마디조차 건네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타인의 기쁨에는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슬픔에는 외면하던 세상 사람들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저씨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되고 말았다.

"다시 태어나면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지안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던 후계동, 나의 아저씨가 태어나 훌쩍 중년이 되도록 떠나지 못했던 후계동의 주민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고, 자신의 품을 내어주던 너른 어른들이 살아가던 터,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이상사회였다. 연대야말로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하나하나가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한 터전이었기에 비로소 지안은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세상에서라면 다음 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후계동의 언덕 꼭대기집이라도 좋으니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세계는 없다. 우리는 불의에 맞서 작은 돌멩이 하나 던질 용기조차 없었다. 파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검은 침묵에 휩싸여 있다.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애도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함부로 아저씨를 입에 올리기에는 한 없이 무거워지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도 작은 짱돌 하나 던지는 심정으로 이 글을 갈무리하기로 했다.

다들 가슴에 짱돌 하나씩 품고 검은 어둠 속으로 힘껏 던지기를 바라며, 그 돌들이 모여 거대한 탑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아저씨를 떠나보내며 용서를 비는 우리의 애도가 될 것이다.  


안녕, 늘 내게 위안이 되어 주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내게 위로가 되어 줄 나의 소중한, 아저씨.

한 번 안아 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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