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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편 Feb 17. 2024

비포 선라이즈
그리고 비포 선셋

원더풀 라이프

"난 나 자신이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파라고 생각돼. 내 인생은 그 노파의 기억 같은 거지."

"난 늘 내가 열세 살짜리 꼬마라고 생각하거든. 어떻게 해야 어른이 되는지 잘 모르는 꼬마."

"그럼 노파가 꼬마한테 키스한 거네."

삶을 다 소진해 버린 노파와 같은 셀린과 늘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제시,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청춘이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기차에서 만난다.


제시는 봄 내내 경비를 모아서 미술사 공부를 하고 있는 여자친구를 보러 미국에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런데 정작 여자친구는 단둘이 있으려 하지 않았다. 종지부를 찍고 제일 싼 비행기표를 끊었지만 2주 후 티켓이라 유레일 패스를 사서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유령처럼 아무도 모르는 존재로 지내던 마지막 날, 보티첼리의 그림을 찢고 나온 듯한 여신을 만난다. 부다페스트의 할머니 집에서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 개강을 맞아 돌아가던 셀린이 제시의 심장에 뚫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차창 밖으로 무심코 흘러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대화는 철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덜거덕 덜거덕 덜거덕 덜거덕, 덜컹덜컹... 리듬을 타고 그들의 심장을 두드리는 울림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내 자아로 이루어진 첫 기차여행은 스물두 살의 6월이었다. 친구와 약속을 하고 청량리에서 강릉행 밤기차를 탔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 속을 달리는 열차에서 덜컹거리는 리듬이 드럼스틱처럼 내 심장을 두드려댔다. 쿵쿵쿵, 심장박동이 점점 거칠어지고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늘 누군가에게 싸대기를 맞은 기분으로 부어 있던 볼이 말랑해지고 브래지어를 벗어던진 기분이 들었다. 첫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내가 기차 페티쉬 같은 게 있음을 깨달았다.

손에는 캔맥주가 들려 있고, 곁에는 늘 권태에 빠져 있던 친구가 안주를 대신했다. 여자고등학교 2, 3학년을 줄곧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권태로 질식할 것 같다는 친구와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 같았던 나는 가끔 그런 식으로 접선을 하듯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삶의 무게에 저울추를 맞춰갔다.   

그렇게 푸르스름한 빛이 창가를 덮치는가 싶더니 희부윰한 대기 사이로 시퍼런 바다가 나를 향해 벌거벗고 달려들었다. 그리곤 세상에! 시뻘건 해가 마지막 오르가즘을 향해 떠오르고 말았다.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강릉, 강릉역입니다."


종착지에서 내려야만 하는 제시는 단 하룻밤 비너스를 끌어내리는 데에 성공하고 천상의 레일에서 제시와 함께 뛰어내린 셀린.

"대중매체는 파시즘의 새로운 형태야."

소르본느의 혁명 여신은 속사포처럼 자신의 소신을 쏟아낸다. 너무나 섬세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영특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셀린을 바라보는 제시의 눈이 빛을 낸다.


셀린은 어릴 적 찾아낸 공동묘지로 제시를 이끈다. 다뉴브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의 일부는 보트사고로 죽고 대부분은 강에 투신한 사람들이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씨들의 묘지에는 열세 살에 죽은 엘리자베스의 무덤이 있다. 셀린이 처음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 그녀도 열세 살이었다. 이제 그녀는 열 살을 더 먹었는데도 엘리자베스는 아직 그대로 열세 살이다.

삶이란 그렇듯 다뉴브강의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지만 죽음이란 무덤에 갇힌 엘리자베스처럼 영원히 멈춰서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라 믿어. 그건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그 시도가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들은 밤새 비엔나의 골목을 거닐며 거리를 누빈다. 마치 꿈속의 세계에 들어선 듯, 제시는 셀린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 듯, 셀린은 제시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 듯 꿈길을 서성인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이기에 더욱 순간순간을 멋들어지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어둠에 잠긴 공원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며, 동이 트기 직전 힘껏 몸을 포갠 채 잔디를 뒹굴며...

"넌 오늘과 같은 밤이 지금 이 순간 내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내겐 중요해."

 This is a great morning.

그렇게 맞이하는 아침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하늘은 어떤 빛깔을 띠고, 해는 어떤 각도에서 그들을 비추며, 대기는 어떤 온도로 그들의 피부에 와닿을까?  




<천사여 고향>을 보라에서 토머스 울프Thomas Wolfe는 이렇게 말하죠.

모든 인간은 각자 쌓은 체험의 총체이며 작가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글로 적을 뿐이다

가 살아온 삶은 평범했어요. 허나 모든 삶은 드라마입니다. 전 삶 속의 '만남'에 관한 얘길 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만남의 인연이었거든요.

<비포 선라이즈>의 헤어짐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비포 선셋>의 제시는 작가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셀린과의 추억을 내용으로 한 책의 북 투어를 하고 있는 파리의 서점에 바로 그녀가 나타난다.


비행기 출발시간을 앞두고 차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9년 전 기억의 편린들을 짜 맞추기 시작한다.

헤어지면서 6개월 후 그곳 비엔나역 9번 승강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셀린 할머니의 임종으로 장례를 치르느라 재회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던 그들은 영영 만날 길이 없었다. 제시는 상실감으로 보내다 마침내 그 추억의 파편들을 모아 책을 냈다. 혹여, 셀린이 그 책을 읽고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하여 기적은 이루어졌다. 소르본느의 혁명가는 이제 정치로는 아무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겠다며 환경운동가가 되어 있다.

"희망? 희망이 어딨어?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야. 선진국들은 공해 산업을 임금이 싼 후진국에 떠넘기고 있고, 전염병으로 매년 5백만 명씩 죽어가는데 무슨 희망이 있어?"

여전히 염세적인 셀린을 향해 세상은 점점 나아질 거라고 다독이는 제시,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여겨진다. 네 살짜리 아들과 아내 그리고 성공한 작가라는 존재감까지 그를 빛나게 한다.

"어릴 땐 몸은 팔팔해도 마음은 불안정했지. 지금은 힘든 일도 여유 있게 대처해."


그들의 시간은 보트를 타고 세느강을 따라 과거로 흐른다.

"요즘은 다들 쉽게 사랑하고 쉽게 끝내잖아. 옷 바꿔 입듯 상대를 바꾸지.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 헤어진 빈자린 딴사람이 못 채워줘."

셀린의 내상은 생각보다 훨씬 깊어 보인다.  

네가 그날 밤 내 모든 것을 다 가져가버린 것 같아. 그날 내 모든 것을 태워 버려서 내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엉클어진 감정의 실타래는 회한들을 쉽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행이라는 기차에서 내려선 그들 각자의 삶은 현실 세계에 단단히 발을 묶어 놓았다. 더 이상은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의 거리가 그들에게 가로놓여 있다. 그날 밤 설령 두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더라도 섹스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친구와 나는 지난한 시간이 지나서 다시 강릉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동안 서로 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기도 하고, 그녀와 나 역시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낸 적도 있었다. 너무도 다른 우리 사이의 간극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권태로운 삶이란 사치와 같은 것이었고, 그녀에게 조율되지 않는 내 감정의 폭발들이란 버거웠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선로를 달리다 우리는 다시 한 방향으로 맞닿은 철로에서 조우했다. 그녀의 권태는 켜켜이 입혀진 채 닳아서 그 나름의 윤기를 내고 있었고, 내 억누를 수 없는 감정들은 차츰 가슴에 빈구석들을 헤집고 건반을 깎아 조율하는 법을 익혀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동안 나는 가끔 기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곤 했다. 첫사랑의 유혹처럼 덜컹이는 리듬에 맞춰서 뛰던 심장의 기억을 더듬으며 삶이 버거울 때면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현실이란 늘 꿈꾸는 이상과는 다른 법인지라 21세기의 기차는 이제 잡을 내지 않으며 새색시처럼 레일 위를 사뿐히 미끄러져 가곤 했다그렇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파동은 내 맥박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했다. 

한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내 맥박이 너무나 희미해서 기계의 주파수로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뿐 손목을 잡고서는 진맥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 했다. 그 정도 파장으로는 죽어있는 내 생체 네르기를 두드려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21세기의 기차는 구렁이 담 넘듯 미끄러져갈 뿐만 아니라 너무 빠르게 질주해서 컴컴한 새벽녘에 우리를 떨구어놓고야 말았다.

택시를 타고 경포대에 앉아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점령군처럼 밀려왔다 패잔병처럼 밀려가고 겨울바람이 매섭게 싸대기를 갈겨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맥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분다."

"그래, 바람이 불어서 좋다."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바람이 불지 않아서 좋았을 것이다. 셀린의 버전으로 말하자면 사람들과 특별한 일을 공유할 때면 옆에 누가 있는가가 중요한 법이다. 내 감정을 정확히 이해해 줄 누군가 말이다.

하늘은 차츰 푸르스름한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허공에 번져갔다. 시린 바람 사이로 미세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This is a great morning.


"손을 대기만 해도 내가 다시 형체도 없이 허물어지는지 보고 싶어."

이별의 순간이 오자 셀린은 제시를 끌어안는다.

"네 노래를 듣고 싶어."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을 그들의 심장은 다시 두 사람을 셀린의 방으로 인도하고 셀린은 자신의 자작곡을 들려준다.

그리곤 니나 시몬의 버전으로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주절거리는 셀린.

자기, 비행기 놓칠지도 몰라.
알아

셀린을 바라보는 제시의 눈빛을 보며 나도 알 것 같았다. 셀린의 방 창 너머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동안 제시는 깊숙이 파묻힌 소파에서 결코 엉덩이를 떼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난 챕터에 이어 에단 호크 주연작을 연달아 선택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때로 짓궂은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에서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양가적인 그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와서 나이  좋아지는 배우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가 딜런 토마스 흉내를 내며 읊조리던 W. H. 오든의 시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어느 날 저녁 집 밖으로 나섰는데>


.....


세월은 토끼처럼 뛰어가리니

내 품에 그대를 안을 때

그대는 모든 세대의 꽃

이 세상의 첫사랑.


도시의 모든 시계가 윙윙거리며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오 시간이 그대를 기만하지 못하게 하라

그대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을지니


악몽의 굴에

정의는 벌거벗겨진 채로 뒹굴고,

시간은 그림자 뒤에 숨죽여

그대들이 입을 맞출 때 기침을 한다.


두통과 근심 속에서

인생은 모호하게 새어나가 버리고

시간은 그의 공상을 소유하리

내일 또는 오늘


.......


오, 창가에 서서

눈물이 타올라 흘러내릴 때

당신은 당신의 비뚤어진 이웃을

비뚤어진 마음으로 사랑할지니


저녁이 깊어 밤이 되자

연인들은 떠났다.

시계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깊은 강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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