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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rant lulu Jan 09. 2024

그녀의 빨간 열정

feat. 와인과 커피

왠지 와인 한 잔이 당기는 날이 있다. 추운 겨울날, 프랑크 푸르트 소시지 하나의 짭짤한 단맛과 와인의 떫은 듯 깔끔한 맛이 딱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며칠 전, 저녁 상으로 올라온 청국장찌개에 쉬라즈(shiraz)를 마셨다. 쉬-라즈, 어떻게 발음하면 '그녀(she)라고 하지'로 들린다. 나만의 별 볼 일 없는 단어 추측이지만, 그 짧은 유머로도 스스로 재미나다.


동네 마트에서 1만 원도 채 안 되는, 딱 두 병밖에 안 남은 와인 중에 하나를 무작정 골랐다. 싸다고 저급의 와인은 아닐 테지, 하는 마음으로 데려왔다. 레드 와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가져온 쉬라즈 레드 와인은 여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she)의 빨간(red) 정열이 생각나는...


꼬린내가 하나도 안 나서 좋았다. 쉬라즈 레드 와인이 청국장과 이렇게 찰떡궁합일 줄이야. 와인 페어링의 신세계를 연 것 같아서 흐뭇했다. 콤콤한 프랑스 치즈보다 쿰쿰한 한국 메주콩이 와인과 잘 어울릴 줄이야!






예전에 와인 스타트업을 시작한 french-korean 여성을 본 적이 있다. 한창 스타트업 열기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던 시기였다. TV에는 공유 오피스를 저렴하게 임대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혈기 왕성하게 미래를 창조해 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내가 본 바로 그녀였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이 동그랗고 커다랗고, 활달하고 쾌활하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말도 시원스럽게 했다. 발음도 또박또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 보려는, 아주 바람직한 그리고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아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그녀의 사업은 와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마 프랑스 와인을 유통시키는 것이었던가. 그녀는 어딜 가나 와인을 들고 다닌다. 싸 들고 다닌다는 표현이 맞다. 직원 한 명과 가방에 와인을 종류별로 바리바리 넣고 이동한다.


광장시장을 갈 때도 그녀는 와인을 준비한다. 떡볶이, 순대, 이런 한국 토종의 음식을 먹을 때도 어떤 와인이 잘 맞는지 꼼꼼히 노트한다. 테스트에 테스트를 거듭한다. 기발한 페어링을 발견하면 그녀의 큰 눈은 떼굴떼굴 굴러간다. 눈이 아니라,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간다. 희열에 차서!






그녀가 어느 날,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한국에 있는 양국의 부모님 댁에서. 그날의 저녁 메뉴는 청국장찌개였다. 한국인 어머니가 구수하게 끓여 주시는. 아니다 다를까, 그녀는 청국장에 와인을 페어링 했고, 그것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프랑스 핏줄이 흐르는 부녀는 마치 유레카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날 그것을 받아 적을 걸, 무슨 와인이었더라? 그녀는 한국 음식도 이렇게 프랑스 와인과 맛과 향의 조합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 대목에서 왜 나는 그녀와 나의 공통점을 찾고 있던 걸까? 나는 와인을 잘 모르고, 그녀는 커피를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우리는 서로 각자의 좋아하는 것에서 맛을 느끼고, 향을 훑고, 페어링을 발견하는,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그 점에서 비슷한 열정을 발견한 것일까?


그녀의 립스틱이 빨간색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님 말고. 왜냐하면 그녀의 열정은 레드 와인처럼 붉었기 때문이다. 청국장찌개와 함께 쉬라즈 와인을 마시며, 그녀와 나와의 빨간 열정을 떠올리는 정도면, 기분 좋게 추운 겨울날의 따뜻한 저녁 시간이 아닌가?


아~ 이따가 커피랑 무슨 음식을 먹을까 궁리한다.



wine & coffee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세상 좋아졌네요. 바로 영상이 뜨네요.


그녀의 이름은 '사라 수경'(당시 33세)입니다. 직업은 '와인 큐레이터'이고요. SNS에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는 서비스를 론칭했습니다. '이웃집 찰스'라는 프로그램(2019년도)에서 그녀의 스토리를 방영했습니다.


광장시장에 가는 장면은 없네요. 제 기억에는 시장에 와인잔과 와인을 들고 가서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직원과 페어링 테스트를 했던 것 같은데요. 대신 부대찌개 식당에 가서 와인을 시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머니들이 처음에는 신기했다고 웃으십니다. 그녀는 평소에 삼각김밥, 김치볶음밥, 심지어 마늘종 등등 그때그때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는 영상을 찍습니다. 어때요, 페어링의 세계, 재미있을 것 같지요?


그녀가 청국장찌개와 페어링했던 와인은 리슬링이었습니다. 무거운 청국장의 느낌을 리슬링으로 산뜻하게 잡아 주었답니다. 그녀의 표현이 멋집니다. 마치 '콩에서 꽃이 피는 것 같다'고요. 와인은 이렇게나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아, 그녀의 립스틱은 빨갛지만은 않았습니다. 각양각색의 와인을 페어링하느라 그런지, 립 컬러도 다양하더군요. 그러나 열정은 빨간색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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