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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rant lulu Jan 10. 2024

켜켜이 쌓인 행복

feat. <밤은 부드러워, 마셔>를 읽고 커피를 생각하다 (1)

MOCA. ‘모카’ 커피가 생각나는 발음이지만, 원래 발음은 ‘목하’다. 배우 ‘이청아’의 유튜브 채널 이름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채널이 떴다. 뭐지? 술 마시는 콘텐츠였다. 정확히 말하면, 술을 마시고 책을 읽는 영상이었다.


그녀는 술, 특히 위스키를 좋아한다. ‘향’을 유독 좋아하는 그녀에게 위스키의 거부할 수 없는 ‘향’은 술을 건네는 책으로 이어진다. ‘한은형’ 작가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에세이를 여배우는 낭독한다. 한 번은 바에서 위스키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한 번은 방에서 물 한 잔 놓고 마시면서.


차분하고 낮은 그녀의 목소리는 밤과 술에 그윽히 어울린다. 물 한 모금을 마셔 내려가는 꿀떡~ 소리는 나도 모르게 술 한 잔 꼴딱~ 마시고 싶은 유혹을 만든다. 그 유혹의 목소리에 책을 선뜻 손에 넣었다.     


책은 작가가 조선일보에 2년여 동안 연재한 술 칼럼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계절별로 묶음해 놓았는데, 계절을 꼬집어 읽지 않아도 좋다. 내키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대목을 읽어도 된다. 왜냐하면 어디를 봐도 그 문장은 술을 권하니깐.     


지금이 겨울이니까, 겨울을 먼저 읽었다. 목하가 읽어 줬으니까, 그 부분을 먼저 읽었다. 한 편은 맛이 와닿는 글이었고, 한 편은 향이 와닿는 글이었다. 향의 글을 먼저 이야기하려고 한다. 제목은 ‘시간의 냄새가 담긴 스모크’.


작가의 글에는 은희경의 소설이 등장한다. <중국식 룰렛>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은 살인적인 진실 게임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음험하지 않은가 보다. 이야기에는 술집이 나온다. 그 집은 손님에게 세 잔의 위스키를 내어 준다. 각 잔은 종류가 다른 싱글 몰트다. 손님은 한 모금씩 테이스팅을 한 후 한 잔만 선택한다. 일종의 블라인드 테스트이다. 운이 좋으면 손님은 12년산 스탠더드급 위스키가 아니라, 21년산 스페셜 에디션을 마실 수도 있다. 모든 잔의 가격은 동일하고, 주인은 일체 술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소설에는 '라가불린'이라는 술도 나온다. 라가불린은 물레방아 오두막이 있는 작은 골짜기라고 한다. 소설 속의 한 여자는 라가불린의 바다 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신이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라가불린을 마시기로 한다. 술을 마시면서 오묘하고 원시적인 바다를 떠올렸다. 라가불린에서는 파도에 실린 해조류와 돌과 모래 맛, 그리고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담긴 연기가 났다.     


작가는 위스키 케이스를 버리지 못한다. 거기에 쓰여 있는 위스키의 향과 맛의 연원, 그리고 양조의 비밀에 대한 내러티브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테이스팅 노트는 놀랍다. 그걸 읽고 나서 술을 마시면 정말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원두 패키지를 버리지 못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원두를 샀던 날의 고민, 향과 맛을 독자적으로 상상하며 비교를 거듭하고 고른 뉘앙스, 원두를 받고 뛸 듯이 기뻐 오픈과 동시에 튀어 오르던 향기들, 숨죽이며 3분여 동안 내리며 고대하던 플레이버, 그날의 날씨와 나를 둘러싼 환경들, 함께 있던 사람 혹은 함께 있던 공간. 그때의 행복감들은 작은 봉지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한 뼘만큼 모아 두었다가 꺼낸다. 패키지에 적혀 있는 테이스팅 노트를 곰곰이 씹어 본다. 하나씩 다시 열어 보고 그날들의 향과 맛을 소환한다. 행복은 한 뼘 이상으로 켜켜이 쌓인다.     




발은 부드러워, 마셔 (북커버, 을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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