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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16. 2017

이십대의 8할

징글징글한 10년 지기들

열 아홉을 넘겨 스물이 되던 해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게으른 문장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열 아홉 이후란 대학을 가거나, 가지 않거나의 선택으로 갈리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이 십대의 나와 이십대의 나를 얼마나 다르게 바꾸어 놓았는지 떠올려보면, 대학에 들어갔다는 저 당연한 문장이 가진 의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스무살의 나는 그저 엉망진창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시절의 나는 다듬어지지 않았고, 서투른 것 투성이었다. 스무살도 처음이었지만 대학생도 처음이었고, 대학생이 되면서 주어진 일정부분의 자유도 처음이었다. 모든게 처음이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늘 술을 마셨다. 왜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술은 성인이 된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해본다.


하여튼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누군가 스무살로 다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손사레를 친다. 군대를 다시 가야해서도 아니고(없지는 않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멍청해서도 아니다. 그냥 너무 엉망진창이었고 너무 서툴렀던 내 자신을 또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차라리 스물 넷이나 다섯 언저리 쯤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모를까 스무살이라니, 절레절레. 그런데 스물 넷이라고 좋을까? 글쎄, 난 지금이 좋다.


당연히 1학년 1학기의 학점은 개판이 났다. 일주일에 일주일을 술에 쩔어 사는 대학생이 공부 같은걸 할리가 없었다. 내게 시험기간이란 수업이 없어서 술 마시기 좋은 기간이었고, 시험이 있는 날은 이름만 쓴 시험지만 내고 나와서 술 마실 수 있는 날이었다. 간신히 학사경고를 피한 1.84라는 학점과 C,D로 범벅된 성적표. 웃기게도 나는 선배들이 백지만 내도 C+은 나온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C+이면 괜찮은 성적이네! 위로 A,B가 있지만 밑으로는 D,F가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금메달을 몇 개 땄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랑하며 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연세대 씩이나 간 놈의 생각이 저렇게 단순하다니, 철딱서니 없는 놈 같으니.

이게 겨우 8시를 넘긴 시점이었다. 엉망이었다.

이렇게 개판인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적부터 막연히 꿈꿔온 PD라는 직업을 하고 싶다! 마침 학원 영어 선생님이 연세대에 들어가게 되거든 교내 방송국을 들어가보라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 선생님은 내가 연대를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뱉은 말씀이셨다. 내 성적은, 연대를 올 수 있는 성적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기말고사 기간을 얼마 앞두고, 나는 교내 방송국에 지원했고, 연세교육방송국 50기 제작부 오디오 PD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방송국에 들어간 뒤에 대학생활이 어떻게 됐느냐면, 똑같았다. 여전히 공부는 안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몰두할 대상이 생겨났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을까. 멘트를 쓰고, 노래를 선곡하고, 방송을 만들고 생방송을 내보내는 일. 가끔 축제때면 영상도 만들고 연고전도 생중계하면서. 아, 물론 여전히 술은 매일 마셨다. 이젠 방송국이라는, 합법적으로 집에 안들어가도 되는 명분이 생겨났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물 여덟에, 나는 졸업방송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추억팔이를 하느냐면, 얼마전 그 방송국의 같은 부서 동기들이 제주도로 놀러왔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막상 방송국에서 함께 일하던 이십대 초반에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싸웠다거나 서먹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죽고 못사는 것처럼 굴지도 않았다. 그리고 방송국이 끝나고 자연스레 군대로, 교환학생으로, 워킹홀리데이로 저마다 제 갈 길을 떠나며 멀어지게 됐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한번 두번 만나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레 함께 사는 땅콩집까지 얘기하는 사이가 됐다. 우리중에 누구는 커플이었고 누구는 누구를 좋아했었던 등 사실 밖에서 보면 '뭐하는 애들인가'싶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정말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안주거리로 남은 우리의 이야기들.

엉망진창이었던 첫날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짧은 인생이나마 살다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같다고. 직장에서, 모임에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벼운 말들. 자연스럽게 드는 억울한 감정.


'네가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아마도 우리는 그래서 다시 모였던 것 같다. 함께 그린 플러그드를, 데미언 라이스를, 콜드플레이를 가고 한강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무살때부터 가던 신촌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스물 아홉을, 서른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서. 배경설명 없이도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아마 우리는 자연스레 그런 사람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던 것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웃긴건, 스무살때부터 나를 봐 왔던 사람들도 나에 대해 오히려 가볍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넌 스무살때 이랬으니 지금도 이렇겠지'


그렇게 나를 가볍게 대하고, 깔보고, 무시하기도 한다(솔직히 지금은 아니지만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어마어마한 호구였어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나에게 막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바로 차단이다.). 아마 이 친구들이 좋았던건, '넌 스무살때 이랬는데 지금은 이래서 좋아. 물론 스무살때랑 비슷하게 멍청하고 여전히 약간 허세스럽지만'이라고 이야기해주기 때문이기도 할테다. 뭐, 사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들이 내 글에 대해, 사진에 대해 인정해주는건 '진짜'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가 더 크다. 얘네들이 나를 그리 쉽게 칭찬할 애들이 아님에도, 10년을 봐 온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꽤 크다. 이십대 초반의 내가 사진을 찍고 싸이월드에 글을 쓰며 늘 허세라고 불리던 때를 기억하고 그런 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들이 있기에 그나마 나아진 지금의 네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은, 이들이 두 번째였다.(하나는 15년도 넘게 알고 지낸 동네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 시절의 콤플렉스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진짜로 나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된다.


우리는 스물 아홉이다. 이제 곧 서른이 되는 우리는  서른이 되기 전에 제주에서 만나 여행을 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에서 누군가는 예능피디로, 누군가는 제주에서 작가로, 누군가는 대기업의 대리님으로, 누군가는 스포츠 중계를 하는 사람으로말이다. 그리고 얘기했다. 스무살과 스물 아홉은, 사실 바뀐건 없는 것 같다고. 마흔이 되면 달라질까? 하고 얘기했지만 결국 똑같지 않을까?가 결론이었다. 바뀌는건 세상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지 우리 내면은 그리 크게 바뀐 것 같지 않고,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대학이라는 공간이 십대의 나와 이십대의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그 이유의 8할은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농담)나 다시 돌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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