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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18. 2018

태양은 날마다 선으로 떨어져

2017 몽골 여행 (6/11)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 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렇게만 하면 맘 내킬 때마다 해지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던 거야.

-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보았어!

그리고는 잠시 후 너는 다시 말했지.

- 몹시 슬플 때에는 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
- 그럼 마흔 세 번이나 해 지는 걸 구경하던 날, 너는 그렇게도 슬펐었니?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Saint-Exupéry, 'Le Petit Prince' 중에서-

사막의 한가운데서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느낀 건 모래였다. 얼굴에 모래로 된 서걱거리는 얇은 막이 씌워진 느낌이었다. 졸린 눈을 한차례 힘껏 감았다 떴다. 다들 잠이 든 고요한 게르 안에서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언제 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여행이었으므로 물을 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씻어야 했다. 하루라도 안 씻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아침마다 사람들이 일어나 샤워장이 붐비기 전에 최대한 먼저 씻었다. 씻고 나오자 저 멀리서 일행들이 하나 둘 잔뜩 부은 눈을 한 채 씻으러 오는 모습이 보였다.


- 따뜻한 물 나와?

-응 잘 나와!


아침부터 부지런히 씻고 난 뒤 아침을 챙겨 먹고 다시 길 위로 향했다. 이상하다. 분명 그 당시엔 아침마다, 저녁마다 무얼 먹었는지 선명하게 기억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억나는 건 드문 드문 파편으로 남은 조각들 뿐이다. '한국 아니, 어떤 여행보다도 몽골에선 열심히 아침을 먹었어. 빵을 먹거나 김치볶음밥을 먹거나,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 날 아침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아' 하는 식이다.


전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막은 여전히 한쪽에 길게 펼쳐져있었다. '사막을 넘어가는 걸까?', '긴 모래의 띠 사이에 비밀의 계곡이 있는 걸까?' 싶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모래의 언덕을 옆에 낀 채로 달렸다. 생각해보니 그 모래의 늪지대 속에 자동차가 들어간다는 일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잠이 덜 깬 나는 덜컹거리는 푸르공 안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잠들었다기보다는 눈을 감고 있었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을지도 몰랐다. 도로도 아닌 평원을 달리는 차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진동이 심한 차 안에서는 주기적으로 창문에 부딪혀 '아!'하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번쩍 깨기 일쑤였다. 어느덧 차가 멈춘 느낌에 눈을 떴을 때, 사막은 끝나 있었고 모래와는 달리 단단하고 곧게 솟아 있는 돌로 된 계곡에 둘러싸였다. 전날 본 모래의 계곡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어서, 나는 이상하리만치 어색한 기분에 휩싸였다.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몽골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혹시나 또 펑크가 났나? 싶은 불안감에 휩싸일 때쯤 가이드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산양이 나타났다고 말해주었다.


산양이라고?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산양이 어쨌길래 차를 세운 거지? 멍청했던 나는 산양이 나타났는데 왜 차를 세운 것인지도 몰랐다. 들어보니 산양이라는 동물 자체가 몽골 여행을 하면서 한 번이나 제대로 볼까 말까 한 희귀한 동물이라고 했다. 근처에는 우리 외에도 서양인 무리를 태운 밴 두 대 정도가 더 있었다. 들떠있는 그들을 보며 확실히 보기 드문 동물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채도의 회색으로 이뤄진 돌 산 사이에 있는 산양은 보호색으로 몸을 숨긴 카멜레온처럼 한눈에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일행들이 가리키는 곳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산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 있는 산양은 손톱 정도 크기로만 보였지만 비범하고 희귀한 동물이라고 하니 왠지 그런 것 같이 느껴졌다. 괜히 움직임도 더 기품 있어 보였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자기 몸통 만한 뿔을 머리에 달고 다니는 산양의 모습은 신성하다기보단 애처로워 보였다.


한참 동안 신기한 듯 산양을 쳐다보던 우리에게 가이드는 산양은 죽을 때가 되면 절벽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을 했다.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나는 내가 산양에게서 느꼈던 애처로움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산양의 뿔, 그건 죽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산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뿔이 커지기 전에 인간들이 산양의 뿔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할 가능성이 더 클 테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산양에게 점점 더 커지는 뿔이란 죽음을 의미했다. 날마다 커지는 죽음이라니. 잔인한 죽음의 비유처럼 머리 위에 항상 뿔을 이고 다니는 동물을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쳐다봤다. 저들은 지금 동료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절벽 위에 오른 것일까. 사막과 산양, 어쩐지 퍽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목적지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이 날도 중간에 작은 도시에 들러 장을 본 뒤 식당에 들어가 몽골 음식을 먹었다. 매일 점심에 먹는 몽골 음식은 늘 시시한 긴장감을 동반했다. 과연 오늘 가는 식당에는 어떤 음식이 있을 것인가, 어떤 음식을 먹어야 먹을만할까? 따위의 긴장감이었다. 몽골 음식의 느끼한 맛은 좀처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이 날 새롭게 먹어본 음식은 몽골식 볶음면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이왕'이었다. 보통은 양고기를 넣는다는데 우리가 먹은 초이왕에는 소고기가 들어있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먹던 음식들과 흡사한 음식이어서 그랬는지,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었으나, 역시나 이 음식에도 케첩은 필수였다. 몽골 음식의 느끼함이란. 소고기나 면보다는, 안에 있는 감자가 맛있었다. 몽골 감자는 우리나라에서 먹은 것 보다도 훨씬 달고 고소했다.

점심을 먹은 뒤 이동하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잠에 들기도 하다가 흘러가는 초원의 똑같은 모습을 보는 일에 질릴 때쯤 우리는 목적지였던 바얀작에 도착했다.


붉은 대지 위엔 비 맞은 옷에 생긴 진한 얼룩처럼 군데군데 그림자가 있었다. 나무 한그루, 빌딩 한 채 없는 이 곳에 생긴 저 그림자는 무엇일까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그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도시에선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선명한 구름의 그림자였다. 빌딩과 사람과 미세먼지가 없는 그곳에서는 구름 그림자가 또렷해서 낯설게만 느껴졌다. 푸른 하늘에 프린팅 된 무늬 같은 하얀 구름과, 붉은 대지. 끝없는 수평선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절벽은 색채로, 수평과 수직의 선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차강 소브라가가 올록볼록한 곡선의 땅이었다면, 바얀작은 선이 굵은 직선의 땅이었다.


나는 날마다 몽골의 기이한 땅을 밟을 때마다 이 땅을 여행하는 일이 마치 우주를 여행하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광활한 선으로 펼쳐지는 대지에 점처럼 놓인 사람을 보는 일을 몇 번씩 겪고 나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날마다 다른 행성에 불시착하는 여행. 이 날부터 나는 몽골에서 늘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이곳에선 어린 왕자에 나오는 모든 묘사가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바얀작을 둘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몽골에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해도 안전설비 등은 전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런 모습이 자연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것 같아 좋았지만 코스를 둘러볼 때는 늘 조심해야 했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따라 걷는 트래킹을 일은 오전에 봤던 산양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뿔이 자란 산양들은 이런 절벽으로 올라가 스스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몽골 여행에서는 하루가 끝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할 일이라곤 서로가 모여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게르터로 추정되는 원 안에 들어가 노래를 틀어 놓곤 자신들만의 스테이지(?)를 만들어 춤을 추고 웃고 있는 동생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가 문득 지평선을 바라봤다.


날마다 그랬듯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사위는 밝았지만 시간은 여덟 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몽골에선 늘 아홉 시가 되면 붉은 해가 퍼렇게 졌다. 끝이 아득한 몽골의 지평선으로 추락하는 해는 늘 금방 자취를 감추곤 하는 도시의 태양보다 끈질겼다. 해가 지는 시간이면,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해서 내 작은 숨소리조차 공기의 틈을 시끄럽게 메우곤 했다. 나는 해가 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린 왕자의 작은 별 b612에서는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노을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해가 느릿느릿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밤 아홉 시 언저리가 되면, 나는 어린 왕자의 별에 온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 너머로, 노을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세계가 정지한 듯한 시간이었다. 주황과 연보라가 섞인 빛 만이 공기를 감쌀 때, 나는 왜 어린 왕자가 슬플 때 노을은 본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건 슬프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해서, 기쁠 때도 슬픔을 자아내고 슬플 때도 슬픔을 잊게 하는 풍경이었다. 태양은 날마다 선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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