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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06. 2023

회사의 생애 4화

우리는 글로벌로 간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글로벌로 간다


그러니까, 이지경이 되도록 회사에 이상한 낌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은 이미 작년 말부터 다양한 형태로 들려왔다. 누군가는 여름부터 이미 낌새가 있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알게 된 것 보다도 더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소문이 아닌 체감으로 느꼈던 사건은 11월 말 경 있었던 마케팅 중단과 뜬금없는 글로벌 진출 소식이었다.


석준 님 저희 마케팅 중단한대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쯤 띄워지는 메시지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말을 타자로 쏟아낼 자신이 없어진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혜인 님이 앉아있는 자리로 찾아갔다. 그녀는 바로 같은 층을 쓰고 있었다.


"혜인 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최근에 새로 만든 광고소재 잘 돼서 CAC 낮게 내려갔다고 지난주 주간회의 때도 축제 분위기였잖아요?"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최대한 작게 속삭이며 혜인 님께 속삭였다. 그녀의 표정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이 상황을 본인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디지털 마케팅 쪽 예산 줄이라고 지은님이 마케팅 실장인 태용 님한테 얘기했대요. 저도 직접 들은 건 아니고 태용 님이 아침에 스탠드업 미팅 때 얘기하셔서 오늘 갑자기... 말이 줄이라는 거지 그 정도 예산이면 사실상 중단이라고 보는 게 맞는데, 하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이 회사에서 실무진이 잘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윗선에 의해 하루아침에 중단되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회사를 3년 가까이 다니면서 나는 '스타트업이란 원래 이런 곳인가'하는 문장을 수없이 떠올렸다. 경영진에게 스타트업이란 곧 '린'하고' 기민하게'움직이는 집단이었고, 그건 실무진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본인들이 지시한 프로젝트를 하루아침에 갈아엎을 수도 있단 소리의 동의어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가 마케팅하고 있던 '농사랑'앱은 회사의 핵심 서비스나 다름없었다. 마케팅팀의 목적은 회원수를 빨리, 많이 모아 업계 1위를 차지하는 일이었고 콘텐츠팀은 그런 마케팅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광고소재를 제작하거나 신규회원을 모으기 위한 콘텐츠 제작 업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던 팀이었다. 사실상 대다수의 회원을 디지털 마케팅에 쏟는 예산으로 모으고 있던 우리에게, 마케팅 예산을 줄인다는 말은 마케팅팀과 콘텐츠팀에게 업무를 중단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콘텐츠팀은 그나마 최근 들어 앱 내에 들어가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나았지만, 마케팅팀 입장에선 회사가 '필요 없는 인력'이라고 낙인을 찍는 소식이나 다름없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도 나지만, 마케팅팀 구성원인 혜인 님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소식일 수밖에.


"너무하네요 진짜... 이렇게 한 번에 예산을 삭감해 버린다니. 오랜만에 광고소재 효율 잘 나와서 신났었는데." 혜인 님이 실망하는 건 너무 당연해 보였다. 기존 마케팅을 담당하던 사람이 제작해 둔 광고소재 이후에 인수인계를 받아 광고를 운영하던 그녀가 제작한 광고소재는 기존 광고소재의 효율을 계속해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두 달 만에 괜찮은 효율의 마케팅 소구 포인트를 찾은 것이었다. 이제야 광고 예산도 늘려보고, 잘 나온 메시지로 다양한 광고소재를 제작해 보려던 입장에선 진이 빠질 수밖에.


나 역시 몇 달간 다른 업무에 투입되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광고소재를 만들게 된 지 불과 2주도 안되어 이런 일이 생겨 허무하긴 마찬가지였다. 회사원의 업무엔 일종의 '스위치'같은 것이 있어서, 새로운 일을 부여받거나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그 일을 위한 스위치를 딸깍-하고 켠 뒤에 업무 집중모드에 몰입하게 된다. 온 신경을 거기에 쏟다가, 갑자기 스위치를 누군가 강제로 내려버리면, 눈앞이 순식간에 깜깜해져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새로운 업무를 맡은 지 채 2주도 안되어 제삼자가 그 스위치를 강제로 내려버릴 때의 허무함이란.


"하하하... 이렇게 된 거 술이나 한잔 해요. 승환 님도 한 잔 하실래요?"실성한 듯 웃던 혜인 님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같은 팀 승환 님과 나에게 번개를 제안했다. 불과 지난주까진 다소 어색했던 우리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함께 전의를 다지는 끈끈한 동료가 되어 있었다. 이 회사의 몇 안 되는 순기능은, 직원들로 하여금 똘똘 뭉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본인들이 알아서 제공해 주는 데에 있었다. "좋아요. 맥주나 한 잔 하러 갑시다. 자리로 가서 어디서 마실지 좀 찾아보고 있을게요."제안을 수락한 내가 네이버 검색창에 '문정동 맥주집'을 검색해 리스트를 훑어보기 시작할 때 즈음, 혜인 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석준 님, 맥주 말고 소주로."


"아니 한 두 번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렇게 한 달 도 안 돼서 엎어버려요? 좀 진득하게 참을성이 있어야지 경영진들이 말이야. 진짜 생각할수록 개빡치네."소주 한 잔을 털어놓은 혜인 님이 마치 소주의 쓴 맛을 뱉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불판에선 얇게 썰어놓은 차돌박이가 기름을 자글자글 내며 구워지고 있었다. 나는 고기를 한 점 들고선 "진짜 혜인 님도 고인물인데 여기 다니면서 이런 일 많았겠네요."하고 동조했다. "아 진짜, 둘 다 2년 넘은 고인물이죠? 와...1년도 안 된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환 님이 한 마디를 거들었다. 혜인 님이 나와 승환 님의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진짜 짜증 나는 건 뭔지 알아요? 3년 동안 프로젝트가 엎어진 게 한 두 개가 아니라서 포트폴리오에 쓸 게 없다는 거예요."


그 소식이 있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러분, 저희는 농사랑에서의 성공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로 진출합니다. 당분간 모든 국내 운영을 중단하고, 최소한으로 운영하면서 글로벌 앱 런칭을 준비할 겁니다. 오픈 시기는 1월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많은 궁금증이 있으실 텐데, 조만간 설명드릴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CPO가 본부 전체 그룹방에 올린 슬랙 메시지였다. 글로벌? 1월? 한글로 쓰여있는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만 가득한 메시지였다. 심지어 일본, 미국 같은 특정 국가도 아닌 100여 개가 넘는 국가에 어떻게 두 달 만에 모든 언어를 대응하며 앱을 런칭할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의문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메시지가 전달된 직후 5층 전체에는 키보드가 타닥- 타닥- 거리는 소리가 금세 가득 찼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사내 슬랙 통계를 살펴보면 순간 메시지 전송 빈도수가 해당 시기에 급격하게 상승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팀도 예외는 아니어서, 팀원들은 슬랙에서 분주하게 해당 메시지를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시작은 해린 님의 메시지였다. "석준 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혹시 들으신 거라도 있어요? 글로벌이라뇨. 저희 그럼 글을 도대체 몇 개를 써야 되는 거예요. 아니, 글이 문제가 아니라 언어는 어떻게 하려고...? 농사는 나라마다 다 다를 텐데 그건 어떻게 하고...?"해린 님은 '불가능하다'라는 한 마디를 듣고 싶은 사람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불과 며칠 전까지 농작물별로 이뤄진 커뮤니티를 만들겠다고 서른 개가 넘는 작물들에 대해 조사하고 콘텐츠까지 미리 작성해 둔 해린 님이었다. 커뮤니티를 오픈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국내 서비스 운영 최소화'며 '글로벌 진출'을 운운하고 있는 이 상황이 그녀에겐 쉽사리 납득될 리가 없었다. 지난 몇 달간 이 작업을 위해 해린 님뿐 아니라 모든 콘텐츠팀 팀원들이 해당 업무에 모두 투입되었는데, 그걸 이렇게 날려버린다니. '회사는 우리에게 주는 돈이 아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방향성이었다. "들어보니 105개국이라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저걸 1년도 아니고 두 달, 거의 한 달 만에 하라는 건가?"나 역시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한 마디를 보탰다. "어질어질하네요. 어쩌자는 거지."


그나마 우리는 양반이었던 것이, 개발팀을 비롯해 기획자, 마케터들은 거의 들고 일어설 분위기로 CPO와 공개된 채널에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개발자들은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내려진 의사결정인가요?"처럼 나로선 생각지도 못할 댓글을 스스럼없이 메시지 아래에 달아두곤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메시지창에 타이핑을 하고 있어서인지 '누구님이 타이핑 중입니다'라는 채널 메시지 칸의 작은 안내문에는 '여러 사람이 타이핑 중입니다'라고 떠 있었다. 내 자리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면 보이는 CPO자리에선, 점점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결국 그녀는 슬랙 채널에 모든 메시지를 잠잠하게 만드는 한마디를 던졌다.


"여러분께서도 당황스러우시리라 생각합니다. 곧 문의사항을 정리해서 타운홀 미팅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미팅에는 성호님도 함께 참석하실 예정입니다."그러고는 구글폼으로 작성된 설문지 링크가 하나 함께 첨부되었다. 최성호, 그건 회사 대표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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