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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21. 2023

회사의 생애 8화

각자의 사정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각자의 사정


희망퇴직에 의한 구조조정이 공식화되고 난 뒤, 회사에선 당연하게도 아무도 예전처럼 일하지 않았다. 아직 누가 남을지, 누가 떠날지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업무를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최소한의 일만 하면서, 각자 희망퇴직의 조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한 달치 위로금을, 누군가는 두 달치를, 혹자는 아예 그마저도 없을 거라고 했다. 회사에서 퇴직금을 못 주는 형편이 되더라도 나라에서 보전해 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조건에 따라 희망퇴직을 수락할지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 망가진 회사에서 더 남아서 뭐 하냐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마음은 희망퇴직을 수락하는 쪽에 조금 더 가깝게 기울어 있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절반 이상이 떠나간 회사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석준 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뒤에 앉아 있던 해린 님이 의자를 돌려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하... 글쎄요. 일단은 좀 상황을 지켜볼까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해린 님 옆에 앉아있던 지민 님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와 우리 대화에 참여했다. "이 참에 여행이나 가려고요 저는! 그만두고 위로금 나오면 그걸로 적당히 놀다 다시 취직하면 되죠 뭐."지민 님은 벌써 방콕행 티켓을 끊어뒀다는 말을 덧붙이며, 방콕 맛집 아는 분 있으면 추천해 달라는 말을 이어했다. "저는 고민이에요. 지금 저희 부모님 건강보험을 제 직장보험에 들어놔서..."해린 님이 말 끝을 흐리며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저도 그냥 나가도 상관없긴 한데, 이거 때문에 좀 골치 아파요."매사 밝고 긍정적이어서 우리가 '그렇게 세상 살면 큰일 나요!' 하면서 짓궂은 장난의 한마디를 덧붙이곤 하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해린 님을 알고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의 건강보험을 책임져야 하는 해린 님부터, 여자친구와의 결혼 계획을 세워 둔 승환 님, 자녀들의 학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과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회사에서 나가라는 소리를 듣게 된 신규 입사자까지. 회사에 불어온 희망퇴직이라는 칼바람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에 가 쌀쌀하게 박혔다. 서로가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희망퇴직이라는 카드를 자꾸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민 님처럼 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동료들의 얼굴에 그늘이 깊게 드리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 뒤에 숨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대표들에게 우리 모두의 사연을 앉혀놓고 하루종일 듣게 만들고 싶었다. 1,000억 원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던 최대표에겐 특히나 더.


희망퇴직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연수님이 슬랙으로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 석준 님, 오늘 저랑 잠깐 미팅 가능하실까요!

- 어떤 것 때문에 그러세요?

- 아르바이트 분들 재계약 관련해서 얘기 좀 할까 해서요!


정신이 번쩍 드는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자료조사 겸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고용했던 친구들의 재계약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들은 3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고 있었다. 주로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3개월을 하고 그만두는 이도, 그보다 더 하는 이들도 있었다. 회사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마 이 친구들에겐 연장이라는 선택지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 네 그럼 캘린더 확인해 보니 오늘 오후 3시에 괜찮으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 좋아요! 그때 뵐게요.


가장 구석에 위치한 503호 회의실로 들어가자, 곧바로 연수님이 따라 들어왔다. 연수님은 아르바이트들의 근태에 대한 질문으로 미팅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분들 근태는 좀 어떤가요? 그때 소희 씨가 조금 업무 속도가 느리고 지각이 잦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지은님이 세 명까진 아니어도 아르바이트가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시다시피 회사 상황이 좀 이렇다 보니 전부 다 연장해서 가기엔 조금 부담스럽거든요. 3개월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회사에 남는 분들이 결정되면 그분들께 인수인계할 수 있게 1개월 정도만 재계약하는 방향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


그 말인즉, 근태가 제일 괜찮은 한 명 정도만 1개월짜리 계약을 연장했으면 좋겠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담당하고 있던 자료조사는 우리가 서비스하고 있는 앱에서 필수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당장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들의 재계약 여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여기서 말 한마디로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관둬야만 했다. "음... 네 어떤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럼 속도가 가장 빠르고 업무 처리가 명확한 종현 님 한 분 정도만 1개월 더 연장해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그분들이 연장을 하실지 아닐지를 아직 물어본 상황은 아니어서 나중에 개별 면담 진행하고 말씀드릴게요."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을 대답이었다.


직원들에겐 경영진이, 계약직에겐 정규직이 자신의 일자리를 갖고 뒤흔드는 사람들이었다. 희망퇴직을 놓고 고민 중인 우리가 있는가 하면, 구성원 중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해도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누군가의 일자리를 놓고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못내 불편해졌다.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들이 있는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기고 회의실 시간을 연장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제 곧 3개월이 다 되어가네요! 오늘 시간 되시는 분들은 저랑 잠깐 30분 정도만 1:1로 면담 가능할까요?


노트북 앞에서 복잡해진 머리를 잠깐 두 손으로 쥐어싼 뒤, 아르바이트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사상황은 어디까지 얘기하는 게 맞을까? 그 보다 전에, 계약을 연장하면 그 사람에게 돈은 줄 수 있는 상황인 걸까?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잠시 뒤 아르바이트들이 한 명씩 차례로 회의실로 들어왔고, 나는 그들에게 먼저 회사의 상황에 대해 최대한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 털어놓았다. 어차피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그들도 이 사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마 아실 수도 있겠지만, 지금 회사 상황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이 진행 중이에요. 저는 남을지 떠날지 모르겠지만, 회사가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모두에게 똑같이 말했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달랐다. 두 명에겐 계약연장이 어려움을 통보했고, 한 명에겐 한 달 정도의 계약 연장을 제시한 뒤 남은 직원들에게 인수인계를 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대화를 나누다 금세 알아차릴 것이었다. 서로가 다른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약이 연장되지 않은 두 명은 자신들이 누군가와 비교되어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까? 어쩌면 이런 생각자체가 그들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값싼 동정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것에 빠졌던 나는 다시 내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누굴 걱정하겠어. 내 코가 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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