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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22. 2023

회사의 생애 9화

희망퇴직 신청서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희망퇴직 신청서


"[인사팀] 희망퇴직 공고"

"안녕하세요, 최성호입니다"


금요일 오후, 메일함에 두 통의 이메일이 연달아 도착했다. 희망퇴직 조건이 적힌 인사팀의 공식 메일과, 최대표가 회사 전체 구성원에게 보내는 메일이었다. 희망퇴직 조건은 두 달치 위로금과 원하는 사람에 한해 한 달간의 무급 Garden Leave라 불리는 일종의 유예기간을 주는 방향으로 적혀있었다. 가든리브라니,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메일에는 희망퇴직 조건과 함께 신청 기간과 추후 절차, 그리고 구글폼으로 된 희망퇴직 신청서 링크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메일에는 '한정된 재원 등의 제반사정에 의해 신청이 반려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희망퇴직도 심사가 필요한 건가, 나가겠다는데도 붙잡으면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싶었지만 설마 반려될 일은 없겠지 싶었다. 이미 지금 상황에서 나는 회사에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였다.


그다음으로 온 최대표의 메일에는 본인과 경영진의 실패에 대한 사과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안녕하세요, 최성호입니다.

회사가 처한 상황이 날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협업에 계신 여러분이 느끼셨을 줄 압니다. 지난 1월 비상경영체제 선포 이후...

'그러고보니 1월엔 비상경영체제라는 것도 선포했구나!'하고 생각했다. 달라진거라곤 캡슐 커피가 중단되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체감되는 변화는 크게 없었다. 메일엔 '뼈아픈', '실패', '송구스러우나'따위의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몇 천억의 투자금을 그야말로 불에 태우듯 1년 만에 태워버린 대표였다. 핑계라면 핑계처럼 보였고, 안타깝다면 안타깝게도 보였다. 그라고 회사를 망하게 만들고 싶었겠는가. 아무튼 본인 돈을 투자해 세운 회사인 만큼 본인도 잘하고 싶었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건이 정해지니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아무래도 구성원 대부분이 희망퇴직을 신청하려는 모양새였고, 나는 그들이 떠나고 휑해진 사무실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돈보다도 사람들이 떠난다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희망퇴직 신청서'라고 적힌 구글폼을 타고 들어가자 생각보다 양식은 심플하게 되어 있었다. 소속팀과 이름, 가든리브 신청 여부정도만 체크하면 되게 되어있었다. 내가 고민할 것은 가든리브를 신청하느냐 마느냐였다.


"해린 님, 해린 님은 가든리브 어떻게 하실 거예요?"하고 뒤에 앉은 해린 님에게 의견을 묻자 "저는 하려고요. 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싶은데요? 뭐, 저는 어쨌든 지난번에 말한 건강보험 건도 있고 해서."라는 심플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 소속된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편이 나아 보였지만, 이것도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것 같았다. 당장 현금이 필요한 사람들은 위로금이나 퇴직금 지급이 한 달 정도 늦어지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지민 님은 메일이 오자마자 바로 제출해 버린 뒤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었다. 희망퇴직 신청 기간은 일주일 정도가 있으니 조금 더 고민해 봐도 될 듯했다. 그러던 중 슬랙 채널에 지민 님의 슬랙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 @here 저희 이제 글로벌 콘텐츠는 업로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희망퇴직 기간 일주일 동안 회사 근처 술집에서는 심심치 않게 회사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그동안 회사에서 함께 업무만 했을 뿐 같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는 이들과 점심과 저녁마다 약속을 잡고 식사를 함께했다. 희망퇴직 신청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이미 한 달 정도 전부터 회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오래도록 지지부진하게 길고도 긴 작별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결정되어 속이 후련하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건 좋은 동료들과 떠나는 일이 무엇보다 아쉽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채용팀이 정말 일을 잘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말들을 하면서.


"석준 님 저도 희망퇴직 신청할 겁니다."자리로 온 승환 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결혼준비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나 하면서 끝까지 고민하던 그였다. "어차피 남아 있어 봐야 뭐, 일도 제대로 안될 것 같고 해서요. 오히려 잘 됐어요. 결혼준비 할 거 많았는데 쉬면서 준비 잘해보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잘 생각했어요. 결정했으니 이제 뒤 돌아보지 말고! 결혼하고 나서 정리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되죠!" "석준 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출하셨어요?" "아뇨, 아직 제출은 안 했어요. 너무 바로 제출하는 것도 좀 그래서요. 기다렸다는 듯이 내는 건 좀 그렇기도 하고... 아마 낼 것 같긴 한데 아직 제출은 안 했어요."변명하듯이 내가 덧붙이자 승환 님이 말했다. "그러다 신청기간 놓치지 말고 빨리 내요."


승환 님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메일함에 들어가 다시 신청서 링크를 클릭해 보았다. 이윽고 '희망퇴직 신청서'라고 적힌 문서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다 채워 넣은 양식을 가만히 쳐다보며 괜스레 마우스 클릭 버튼만 쓰다듬다가, 이내 제출 버튼을 눌렀다.

[희망퇴직 신청서]
희망퇴직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 글자로 내가 희망퇴직을 신청했음을 알리는 문구가 떴다. 이상하리만치 심플한 화면이었다.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는걸까? 너무 간단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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