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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Oct 22. 2023

회사의 생애 10화

회사의 생애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회사의 생애


[인사팀] 희망퇴직 신청 수락 및 사직서류안내

문석준 님, 안녕하세요. 회사는 문석준 님의 희망퇴직 신청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첨부 수락서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희망퇴직 프로세스 및 제출서류 안내 드립니다.

'회사의 수락'이라는 표현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희망퇴직 신청이 무사히 수락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곧바로 슬랙으로 소식을 전해 온 것은 혜인 님과 승환 님이었다.


- 인사팀 메일 왔네요. 수락됐다고.

- 그러게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서도 쭉 보자고요!


곧이어 해린 님과 지민 님 역시 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수락됐다고 메일 왔어요! 확인해 보셨어요?" 가든리브 없이 그만두고 바로 3월에 방콕으로 여행을 떠나는 지민 님이었다. "네 저도 확인했어요. 이제 진짜 마지막이네요... 아쉬워라."해린 님이 못내 아쉬워하자 지민 님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서도 보면 되죠! 우리 나이도 같으니까 앞으론 친구 해요!" 한 팀에 소속된 팀원 전부가 동갑인 상황은, 스타트업이라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좋아요. 나가서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요. 그래도 아직 일주일 남았으니까 벌써 마지막 인사 하진 말자고요 민망하니까."


3년을 다닌 회사를 정리할 시간은 딱 일주일이 주어졌다. 메일엔 비밀유지 서약서나 IRP계좌 개설, 장비 반납 절차 등 퇴사를 위한 프로세스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사팀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 평소 친하게 지냈던 인사팀 정윤 님에게 슬랙 메시지를 보냈다. 첫 만남에서 반말하고 지내자며 말을 놓아버린 특이한 친구였다. 회사에선 거의 유일하게 말을 놓은 사이였다. 말의 형태라는 건 생각보다 영향력이 커서, 반말을 하다 보니 괜스레 더 친밀감이 느껴지던 동료였다.


- 정윤, 정신없지? 퇴사 관련된 궁금증은 아니고! 그냥... 인사팀은 이거 다 처리하면 퇴사는 어떻게 하는 건지 문득 궁금해져서 연락해 봐.


그녀의 슬랙 상태창에는 '순차적으로 답변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적어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각종 문의사항을 슬랙으로 보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궁금증을 마치 전화기 속 자동응답기에 남기듯 메시지를 보내둔 채 천천히 컴퓨터 속 파일과 폴더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찍은 사진이며 영상, 디자인 파일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나름 정리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엉망이었다. 회사에선 항상 정신없이 업무를 마무리 짓고 나면 바탕화면이 한 바닥이곤 했다. 파일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지난 3년 동안 남겨두었던 일종의 발자취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 갈 일이 없을 고성으로 출장을 떠났을 때의 사진과, 이미 회사를 옮긴 동료가 편집한 영상들, 그리고 팀이 바뀌며 헤어진 옛 동료와의 업무 자료들이 내가 이 회사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일들을 했었는지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센치해진 마음이 되어 파일을 한참 정리하고 있을 때쯤, 정윤 님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 석준 슬랙 했었네! 인사팀은 아무래도 필수인력으로 분류되다 보니 조금 남아서 마무리 짓고 3월 즈음에 퇴사 절차를 밟지 않을까 싶어.

- 너도 그만두지?

- 그럼 당연 ^^^^ 혹시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 ㅋㅋㅋㅋ 네 없네요~

- ㅋㅋㅋ 그럼 잘 지내고 조만간 소주나 한 잔 하자 걱정해 줘서 고마워!

- 응 수고해!


문득 예전에 그녀가 인사팀의 숙명에 대해 말했던 게 기억났다. 인사팀은 원래 욕받이라고. 원래 사내 구성원들 궁금한 내용 상담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원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지만 어디서도 티를 내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그 얘기를 들으며 인사팀은 참 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 인사팀은 할 수 없겠다는 생각까지.


마지막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각종 서류를 준비하고 자리에 있던 짐들을 하나 둘 집에 가져다 놓다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이전에 미리 조금씩 집에 회사에 갖다 두었던 짐들을 갖다 놓았던 것이 꽤 도움이 되어서, 정리할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아하니 다들 퇴근할 때마다 매일같이 짐을 한아름씩 들고 옮기고 있었다.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CPO에게 장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받는 서류를 들고 가 서명을 받는 일이었다. 회사를 나간다는 괜한 미안함과, 껄끄러움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있었던 탓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서명을 받을 때 그 사이에 묻혀 함께 서명을 받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마지막날 장비 반납과 사원증 반납, 서류 제출등의 절차는 본부별로 시간대가 나뉘어 진행되었다. 반납 절차는 한 방에서 이루어졌다. 줄을 서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안에는 담당자들이 반원의 형태를 그린 채로 책상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정해진 담당자들에게 차례로 사원증과 서류, 장비 등을 제출했다. 그 절차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해서 일말의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섭섭하다거나 서운할 새도 없이 싱겁게 마지막이 정리되었다. 오히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게 해 주어 고마울 정도였다. 물론 그들도 의도한 게 아니라 그저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겠지만.


자리로 돌아오니 모든 걸 반납한 자리가 휑했다. 이젠 정말 내가 앉아있지 않는 한, 내 자리라는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책상이었다. 괜스레 씁쓸한 마음에 책상을 손바닥으로 한 번 훑어보다가, 한 번씩 멍하니 바라보곤 했던 창 밖 풍경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해 질 녘 노을이 건너편 아파트를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모습이 꽤 아름다워 좋아하곤 했던 풍경이었다. 이제 다신 볼 수 없을 풍경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시선을 돌려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가방을 챙겨 떠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들어올 땐 80명 정도였던 회사는 3년이 지나며 600명 가까이 불어났고, 한 사무실만 쓰던 회사는 이제 거의 6개 층을 쓰는 규모로 커버렸다. 회사는 이제 다시 예전 규모처럼 축소될 것이었다. 한 회사의 흥망성쇠를 3년 만에 보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회사에도 생애주기가 있다면, 내가 몸 담았던 회사는 이제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걸까. 씁쓸함만 남은 채 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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